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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항당운동

zarashin 2007. 3. 12. 14:52
LONG

발해의 건국 이야기   

고구려(高句麗)가 망(亡)하고 발해(渤海)가 건국(建國)될때까지 몇년의 세월이 흘렀을까? 이씨조선(李氏朝鮮)이 망(亡)하고 대한민국이 탄생할 때까지 36년이 걸려 해방(解放)되고 해방되고 금방 나라가 생긴 것이 아니고 미군정(美軍政)을 지나서 반쪽의 나라가 독립(獨立)한 것이고 북쪽은 소련 군정(軍政)하에 있다가 반쪽의 북한정권(北韓政權)이 생긴 것이다. 모두 시간(時間)이 그만큼 걸렸다. 그래서 역사(歷史)책으로 시간을 계산(計算)해보면 발해건국(渤海建國)은 신라 성덕왕(新羅 聖德王)12년 겨울 10월에 당(唐)나라가 신라(新羅)왕을 책(冊)하여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위(爲)하고 특히 행좌위위(行左威衛)대장군(大將軍)  사지절(使持節) 대도독(大都督)  계림주(鷄林州)제군사(諸軍事) 계림주자사(鷄林州刺史) 상주국(上柱國) 낙낭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진(進)하고 대조영(大祚榮)으로 써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위(爲)하니 발해(渤海)는 본시 (本是) 율말 말갈(栗末 靺鞨)이니 즉 高句麗의 별종(別種)이라 대조영(大祚榮)의 부(父) 걸걸중상(乞乞仲象)이 그 무리로 더부러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東쪽을 보(保)하다가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사(死)하고 대조영(大祚榮)이 사(嗣)하니 용감하고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는지라 高句麗의 여진(餘濜)이(고구려의 옛사람이 남긴자취가) 초(稍)히 차(此)에 귀(歸)함으로(조금식 이에 돌아가므로) 내국(乃國)을 건(建)하여(내 나라를 세워) 진국왕(震國王)이라 자호(自號)하고 사(使)를 견(遣)하여(사신을 보내어) 돌궐(突厥)에 교(交)하니 지방(地方)이 5000里요 호(戶)는 십여만(十餘萬), 승병(勝兵) 수만(數萬) 파(頗)히(자못) 서글(書契)(글이란 뜻)을 지(知)함으로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 제국(諸國)을 진득(盡得)하고 중가(中家)의 시(時)에 자(子)를 견(遣)하여 입시(入侍)하더니(아들을 보내 나라를 세웠음을 알리다) 시(是)에 지(至)하여 배(拜)하여(지금에 와서)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위(爲)하고 통(統)한 바로써 홀한주령(忽汗州領) 홀한주(忽汗州)도독(都督)으로 위(爲)하니(홀한주를 다스리는 도독이 되게 하니) 시(是)로 위시(爲始)하여(이에 비로소) 말갈(靺鞨)의 호(號)를 거(去)하고 발해(渤海)라 전호(專號)하니라. (발해의 년호를 전적으로 쓰게 되다)

그러므로 聖德王12년+ 新羅孝昭王 재위10년 + 新羅 神文王재위11년+(新羅 文武王20년(문무왕의 몽한해)-(文武王 8년 卽 寶藏王27년)(고구려가 亡한해))=  45년  그러므로 고구려가 亡하고 渤海建國까지는 45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그러나 新羅는 남쪽에 健在하였다. 그리고 中國은 주변(周邊)의 국가(國家)를 자기들의 위성국가(衛星國家)로 인식(認識)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中國人의 세계관(世界觀)이고 지금도 그들의 생각은 거의 변함이 없다. 이것을 어떻게해석하는가?국제법( 國際法)은 하나의 국가(國家)가 성립(成立)하면 그 國家를 다른 國家가 승인(承認)한다. 그러한 國家의 승인행위(承認行爲)에 해당(該當)한다고 파악( 把握)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의 건국 이야기(3)
 
 

백제의 건국 이야기(3)


百濟 온조왕(溫祚王) 12년 春 正月에 부여왕(扶餘王) 대소(帶素)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인질(人質)로 아들을 교환하기로 청하니 왕이 부여(扶餘)의 强大함을 탄(憚)하여(꺼리다) 태자 도공(都功)으로 인질(人質)코저 하되 도공(都功)이 응하지 않으니 대소(帶素)가 이를 한노(恨怒)하다. 여름 5월에 백제의 모왕(母王)이 몽하다. 왕이 군신(群臣)들에게 말하대 북에 말갈(靺鞨)이 유하여 강경(彊境)을 침범하여 영일(寧日)이 없는데 항차 지금 요사(妖邪)한 징후(徵候)가 자주 보이더니 王母가 몽하니 세자 불안(勢自 不安)이라 여(予)가(임금을 자칭하는말) 한수(漢水)의 남을 본즉 토양이 비옥하니 장차 천도(遷都)하여 나라가 편안하다하고 가을 7월에 명하여 山下에 입책(立柵)하고(울타리를 세우다) 위례(慰禮)의 민호(民戶)를 이충(移充)하다 8월에 마한(馬韓)에 견사(遣使)하여 천도(遷都)를 고(告)하고 강역(疆域)을 정하니 南은 웅천(熊川)에 한하고 西는 大海에 지(至)하고 東은 주양(走壤)에 극(極)하니라 9월에 성궐(城闕)을 세우다. 온조왕 14년에 백제 漢山에 移都하고 (한산은 지금의 서울)2월에 왕이 부락을 순무(巡撫)하여 권농(勸農)하다. 秋7월에 백제 漢江 서북에 축성(築城)하고 한성(漢城)의 民을 分하다. 이달에 동옥저(東沃沮)는 신라(新羅)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양마(良馬) 20필(匹)을 헌(獻)하면서 말하대 과군(寡君)이(임금의 자칭) 南韓에 성군(聖君)이 出함을 듣고 遣使하여 내헌(來獻)한다 하더라. 온조왕 22년 3월에 신라 혁거세왕(赫居世王)이 몽하니 85세요 7일후에 王妃 알영(閼英)이 몽하니 太子남해(南解) 입(立)하여 호(號)를 차차웅(次次雄)이라 칭(稱)하고 시조(始祖)를 사능(蛇陵)에 장(葬)하다.  

백제의 건국 이야기(2)
2007.02.25 17:46


 

 

백제의 건국 이야기(2)

 온조왕 8년2월에 말갈(靺鞨)이 내(來)하여 백제의 위례성(慰禮城)을 포위(包圍)하니라 왕이 성문을 굳게닫고 오래 불출하니 적이 식량이 진하여 돌아가거늘 왕이 예졸(銳卒)로서 간추(簡追)하여(추격하여) 대부현(大斧峴)에서 싸워 이기니라. 온조왕8년7월에 백제는 마수성(馬首城)을 축(築)하고(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우니 낙낭태수(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어 가로대 전자에 문결빙호(問結聘好)하여(사이가 좋아) 의동일가(義同一家)거늘(한가족과 같았거늘) 지금 성책(城柵)을 쌓고 함은 무슨 연고인가 구교(舊交)를 불변하고 훼성파책(毁城破柵)이면(성을 무너떠리고 방책을 제거하면 ) 시의(猜疑)함이(시기하고 의심함) 없거니와 불연(不然)이면 一戰하여 승부(勝負)를 가리자 고하니 왕이 가로대 험설수국(險設守國)(험한 장애물을 설치하고 나라를 지킴)은 고금(古今)의 상도(常道)라 어찌 이로서 우의(友誼)를 변하리오 만약 귀국이 출사(出師)하면 대전(對戰)하리라하니 낙낭(樂浪)과 실화(失和)하니라.(사이가 나빠지다) 온조왕10년 4월에 고구려 유리왕(高句麗 琉璃王)이 가로대 선비(鮮卑)가 험고(險固)를 믿고 아와 친화(親和)하지 않고 이익(利益)이 있으면 출략(出掠)하고(나와서 약탈하다) 불리(不利)하면 입수(入守)하니(들어가 지키다) 항상 국환(國患)이라 차환(此患)을 능제(能制)할(능히제어할) 자(者)있으면 중상(重賞)하리라하니 부분노(扶芬奴)가 모책(謀策)으로서 반간(反間)을 설(設)하야 국소병약(國少兵弱)을 시(示)하면(나타내면) 선비(鮮卑)는 이를 능시(凌視)하여 응당 설비(設備)치 아니하리니 그 틈을 이용하여 정병(精兵)으로 칠 것이라 건의(建議)하니라.왕은 성남에 주둔하였다가 패(敗)하는척 하시면 저쪽은 필시 성을 비우고 따라 올 것이니 신은 정병(精兵)을 이끌고 그 성에 입성(入城)하였다가 왕은 친히 용감한 기병을 이끌고 협공하면 이길 것입니다. 왕이 그의 말을 따르니 선비(鮮卑)가 개문출병하고 부분노(扶芬奴)가 그성에 입성(入城)하니 선비(鮮卑)가 놀라 도주하거늘 부분노(扶芬奴)가 당관 거전(當關 拒戰)하여 참살(斬殺)이 심다(甚多)한지라 왕이 거기명고(擧旗鳴鼓)(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다)하고 前進하니 선비(鮮卑)는 복배수적(腹背受敵)에(앞뒤로 적을 맞아) 계궁력진(計窮力盡)(계략이 다하고 힘이 빠져)하여 드디어 속국(屬國)이 되더라 왕이 부분노(扶芬奴)에게 식읍(食邑)을 상(賞)한데(상을 주다) 사양하면서 이는 왕의 덕(德)이라 무슨 공이 있겠느냐하고 받지 않거늘 왕이 황금(黃金)30근(斤)과 말 10필(匹)을 하사(下賜)하니라.  (계속)



백제의 건국 이야기(1)
2007.02.25 15:05

 

주몽(朱蒙)이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 扶餘)에 도망(逃亡)갔을때 그왕이 무자(無子)하고 딸이 셋이 있더라 주몽(朱蒙)이 위인(爲人)이 보통사람과 달라 그 두번째 딸을 취하여 처(妻)로삼고 얼마 안있어 王이 몽하니 주몽(朱蒙)이 두 아들을 얻으니 장남은 비류(沸流)라하고 차남은 온조(溫祚)라 칭하다 유사(類似)가 와서 태자(太子)가 되니 두사람은 태자(太子)로 인하여 두려워 오간(烏干) 마려(馬黎)등 열사람으로 남행(南行)하여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올라 가거(可據)할 땅(자리잡을땅)을 바라봄에 비류(沸流)는 해변에 있고저 하거늘 열사람의 신하가 간(諫)하되 河南은 북으로 한수(漢水)가있고 동쪽은 산이 높고 남쪽은 옥택(沃澤)하고 서쪽은 大海가 있으니 여기에 도읍(都邑)을 정하자 한데 비류(沸流)가 듣지 아니하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彌皺)에 귀거(歸居)하다. 온조(溫祚)는 하남 위례성(慰禮城)(지금의 광주(廣州)에 도읍(都邑)을 정하여 열사람의 신하로 보국(輔國)을 삼고 국호(國號)를 十濟라 하더라 沸流는 미추(彌鄒)가 토양이 습하고 소금기가 많아 安居치 못하고 위례(慰禮)로 오니 도읍이 이미 정해지고 인민이 안태(安泰)함을 보고 마음이 원통하여 죽으니 그 신민이 모두 위례(慰禮)에 귀속하니라 국호를 百濟로 바꾸니 백제는 고구려와 같이 모두 부여(扶餘)에서 출한지라 고로 부여로서 위민(爲民)하다. 백제 온조왕(溫祚王)3년 봄 정월에 백제왕이 군신에게 이르기를 말갈(靺鞨)은 우리 북쪽에 연하고 그 人이 용감하니 마땅히 兵을 선(繕)하고 곡(穀)을 적(積)하여 거수(拒守)할 계(計)를 세워라하더니 3월에 족부(族父)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어 우보(右輔)를 배(拜)하고 병사(兵事)를 위탁하니 말갈(靺鞨)은 옛날의 숙신(肅愼)이오 불함산(不咸山)북쪽에 있어 북은 옥저(沃沮)와 상접(相接)하니라 겨울 10월에 고구려 왕비 송씨(松氏)가 몽하고 왕이 두 비(妃)를 재취(再娶)하니 화희(禾姬)와 치희(雉姬)라 화희(禾姬)는 골천인(鶻川人)이요 치희(雉姬)는 한(漢)나라사람이니 두 희(姬)가 총애를 다투니라 왕이 東西두 宮을 건조하여 각치(各置)하다. 후에 왕이 수렵(狩獵)에나가 7일간 돌아오지 아니한지라 화희(禾姬)가 치희(雉姬)를 욕하여 가로대 한가(漢家)의 노비(奴婢)로 무례(無禮)가 심하다하니 치희(雉姬)가 원한을 품고 돌아간지라 왕이 친추(親追)하되 치희(雉姬)가 노하여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더라.(계속)

백제의 건국 이야기(1)
 
주몽이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도망갔을때 그왕이 무자하고 딸이 셋이있더라 주몽이 위인이 보통사람과 달라 그 두번째 딸을 취하여 처로삼고 얼마안있어 왕이 몽하니 주몽이 두아들을 얻으니 장남은 비류라하고 차남은 온조라 칭하다 유사가 와서 태자가되니 두사람은 태자로 인하여 두려워 오간 마예등 열사람으로 남행하여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올라 가거할 땅을 바라봄에 비류는 해변에 있고저하거늘 열사람의 신하가 간하되 하남은 북으로 한수가있고 동쪽은 산이높고 남쪽은 옥택하고 서쪽은 대해가 있으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자한데 비류가 듣지 아니하고 그 백성을 나누어 이추에 귀거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지금의 광주)에 도읍을 정하여 열사람의 신하로 보국을 삼고 국호를 십제라 하더라 비류는 이추가 토양이 습하고 소금기가 많아 안거치 못하고 위례로 오니 도읍이 이미 정해지고 인민이 안태함을 보고 마음이 원통하여 죽으니 그 신민이 모두 위례에 귀속하니라 국호를 백제로 바꾸니 백제는 고구려와 같이 모두 부여에서 출한지라 고로 부여로서 위민하다. 백제 온조3년 봄 정월에 백제왕이 군신에게 이르기를 말갈은 우리북에 연하고 그인이 용감하니 마땅히 병을 선하고 곡을 적하여 거수할 계를 세워라하더니 3월에 족부 을음이 지력과 담력이 있어 우보를 배하고 병사를 위탁하니 말갈은 옛날의 숙신이오 불함산북쪽에 있어 북은 옥저와 상접하니라 겨울 10월에 고구려왕비 송씨가 몽하고 왕이 두비를 재취하니 화희와 추희라 화희는 골천인이요 추희는 한나라사람이니 두희가 총애를 다투니라 왕이 동서두궁을 건조하여 각치하다. 후에 왕이 수렵에나가 7일간 돌아오지 아니한지라 화희가 추희를 욕하여 가로대 한가의 노비로 무례가 심하다하니 추희가 원한을 품고 돌아간지라 왕이 친추하되 추희가 노하여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더라.  온조왕 8년에 말갈이 내하여 백제의 위례성을 포위하니라 왕이 성문을 굳게닫고 오래 불출하니 적이 식량이 진하여 돌아가거늘 왕이 예졸로서 간추하여 대부현에서 싸워 이기니라. 온조왕8년7월에 백제는 마수성을 축하고 빙산책을 세우니 낙랑 태수 사신을 보내어 가로대 전자에 문결빙호하여 의동일가거늘 지금 성책을 쌓고 함은 무슨 연고인가 구교를 불변하고 훼성파책이면 시의함이 없거니와 불연이면 일전하여 승부를 가리자고하니 왕이 가로대 험설수국은 고금의 상도라 어찌 이로서 우의를 변하리오 만약 귀국이 출사하면 대전하리라하니 낙랑과 실화하니라. 온조왕10년 4월에 고구려유리왕이 가로대 선비가 험고를 믿고 아와 친화하지않고 이익이있으면 출략하고 불리하면 입수하니 항상 국환이라 차환을 능제할 자있으면 중상하리라하니 부분노가 모책으로서 반간을 설하야 국소병약을 시하면 선비는 아를 능시하여 응당 설비치 아니하리니 그 틈을 이용하여 정병으로 칠것이라 건의하니라. (계속)( 내가 이것을 복사하여 다시 한문을 넣고 또한 약간의 한문을 쉽게 풀이할것이니......)

긴급 보도 : 일본은 민간 핵재처리공장을 600개소를  가동중이며 무인 해리콥타 9개를 중국에 매각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경찰조사중이다.무인 해리콥타는 군용으로 전환가능하다.   또한 세균무기공장을  많이 보유하는데 그중요 미생물은 탄저균이다.

 

북한의 핵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일본은 민간의 핵재처리공장을 600개소를 가동중이며 프랑스로부터 핵발전소에서 쓰고남은 핵 폐기물을 재처리를 위하여 핵페기물 수입을 두번이나 하였다.이로 인하여 그린피스등 환경단체들이 핵페기물 수송하는 배를 따라 다니며 해상데모를 한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하고있다.  그량은 알 수 없으나 엄청난 분량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눈깜박 할 동안에 핵 무장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니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응하여야한다. 일본은 수많은 민간 실험실에서 탄저균을 보유하고 있다.  이상 이사실은 보안을 요하니 국익에 관계되므로 은밀히 대응하여야한다. 이상은 일본의 뉴스메디아 인터넷 등을 통하여 입수한 정보이다. 우리는 평화를 위하여 노력해야 하지만 항상 비상시를 대비하여야 하고 은밀히 대책을 강구하여야한다.끝. 

ARTICLE
신라와 당 글안 말갈 연합군과의 7년전쟁(2)
 
 

新羅와 唐 契丹 靺鞨 聯合軍과의 7年戰爭 (2)

文武王 12년 7월에 高侃은 兵 1萬을 率하고 李謹行은 兵 3萬을 率하고 平壤에 至하여 營을 作하고 留屯하니라. 8월에 韓始馬邑의 二城을 攻하여 이기고 兵을 追하여 白水城을 距하기 500步에 營을 作하고 新羅兵은 高句麗軍과 逆戰하여 斬首數千級하니 高侃등이 退하니라 石門에 追至하여 此와 戰하여 新羅兵이 敗退하고 捕虜가 된자 二千餘하고 대아찬(大阿餐)효천(曉天) 사찬 (沙湌)의문산세(議文山世) 아찬(阿餐) 능신두선(能申豆善) 일길찬(一吉湌) 안나사량신(安那舍良臣)등이 死하다. 9月에 王이 대아찬(大阿湌) 徹用等을 遣하여 兵船 一百隻을 領하고 西海를 鎭하니 唐兵은 靺鞨契丹의 兵과 共히 來하여 北邊을 侵하기 凡 九次라 戰爭하여 新羅兵이 이기니 斬首二千餘級하고 唐兵은 호려(瓠濾) 옥봉(玉逢)의 二河에 溺死하는자 헤아릴 수가 없더라

文武王 十四年에 春正月에 新羅는 高句麗의 叛衆을 納하고 百濟의 故地에 據하여 삶으로 이를 지키게하니 帝 大怒하여 王의 爵을 削하고 王의 弟 우효위원외 대장군(右驍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 金仁問이 京師에 在한지라 帝立하여 王으로 以爲하여 歸國케하고 左庶子衛同中書門下三品 劉仁軌로써 鷄林道大摠管으로 爲하고 衛尉卿 李弼을 右領軍으로하고 大將軍 李謹行을 此에 副로하여 兵을 發하여 來討하다가 文武王 十五年에 (唐의 儀鳳 元年)劉仁軌는 新羅의 兵을 七重城에서 破하고 劉仁軌의 兵이 돌아옴에 李謹行으로 安東鎭撫大使로 爲하여 此를 經略케할 새 王이 使를 遣하여 入貢하고 謝罪하니 唐主는 此를 許하고 王의 官爵을 復하고 金仁問은 中道로 還하다가 改하여 臨海郡公으로 封하니라 然이나 百濟의 땅을 多取하여 이미 高句麗의 南境에 抵하여 州郡으로 爲하니라. 唐兵이 契丹 靺鞨의 兵과 共來하여 侵攻한다함을 듣고 九軍을 出하여 이를 待하다. 9月에 薛仁貴는 宿衛學生 金風訓의 父 金眞珠가 本國에 在하여 誅死됨으로서 金風訓을 嚮導로삼아 泉城을 來攻하다. 將軍 文訓등을 遣하여 迎戰하여 이를 이기고 斬首 一千四百級하고 兵船 四十隻을 取하니 薛仁貴는 解圍하고 敗走하니라. 新羅軍은 馬 一千匹을 獲하고 李謹行은 兵 二十萬을 率하고 買肖城에 屯하니 新羅軍이 擊하여 此를 走케하고 馬 三萬 三百八十匹을 獲하고 其兵仗이 是에 稱하니라 唐이 契丹 靺鞨 兵을 合하여 七重城을 來攻하여 이기지못하고 小守儒冬이 이에 死亡하다. 靺鞨이 又赤木城을 包圍하여 이를 滅하니 縣令 선백등실모(仙伯等悉毛)死하다.羅軍은 唐軍과 18戰을  皆勝하고 斬首 六千四十七級하고 馬 二百匹을 獲하다 文武王 十六年 7월에 唐兵이 來하여 道臨城을 攻하여 此를 拔하니 縣令 居尺知 이에死亡하다. 十一月에 沙湌 施得은 兵船을 領하고 薛仁貴와 所夫里州伎伐浦에 戰하여 이를 破하니 大小二十二戰에 斬首四千餘級일새 唐軍이 이미 이기기 不能이더라 文武王 十七年春二月에 唐의 高宗은 高句麗 寶藏王으로서 遼東州都督으로 爲하여 朝鮮王으로 封하여 돌아오게하니 遼東安輯의 餘衆과 東人으로서 唐의 諸州에 在한 者 寶藏王과함께 돌아가게하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에 옮겨 이를 통케하다寶藏王은 遼東에 據하여 反을 圖謀하여   最後의 一戰을 思하고 靺鞨과 潛通하니라.

 

신라 文武王 20년 秋7月

 王이 몽하니 7일이  지나 太子 正明이 立하여 시호(諡號)를 文武라하고  群臣의 遺詔를奉하여 東海口의 石上에 장(葬)하다.

新羅 31世 神文王의 2년 夏 6월에 故 高句麗 보장왕(寶藏王)이 공주(邛州)에서 졸하다.  唐主는  新羅가 굴종(屈從)치 아니함을 노(怒)하여 포획(捕獲) 억류(抑留)한 故 高句麗 보장왕(寶藏王)을 방(放)하여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으로 爲하여 재차(再次) 新羅를 억제(抑制)하려 하는지라 보장왕(寶藏王)이 요동에서  반(叛)을 모(謀)하여 마락(靺鞨)과 잠통(潛通)하였으나 事不成하고 자(玆)에 지(至)하여 드디어 졸(卒)하나 당주(唐主)는  반지(叛志)를 알지못하고 차(此)에 위위경(衛尉卿)을 증(贈)하고 조(詔)하여 척(尺)으로서 경사(京師)(서울)에 힐리(詰利)묘(墓)의 左에 장(葬)케하고 비(碑)를  세워 기인(其人)을 河南롱(隴)右諸州에 도(徒)하고(옮겨 이사하는 것) 빈자(貧者)를 安東성방(城傍)의 구성(舊城)에 유(留)케하니 왕왕(往往) 나라의 병사들이 죽는지라 (兵의 沒한배되는지라) 여주(餘州)에 산(散)하여(나머지 여러 주에 흐트져) 말갈(靺鞨) 돌궐(突厥)에 入하니라 唐主 高句麗 보장왕(寶藏王)의 손자(孫) 보원(寶元)으로서 朝鮮郡王으로 爲하고 故百濟  의자왕(義慈王)의 손자(孫) 경(敬)으로서 王을 습(襲)케하니라(왕의 자리를 잇게하다) 그러나  二國의 구지(舊地)는이미  발해(渤海)및 말갈(靺鞨)의 분령(分領)한바 되니라(나눈바 되다) 

고구려의 멸망전후 십년의 이야기(4)

고구려 寶藏王 26년 신라 文武王 7년 帝는 勅書를 내려 新羅人 智鏡 개원(鎧元) 日原으로서 將軍으로 하고  遼東의 싸움에  行하게할 새 劉仁願 金仁泰로하여금 卑列道로하고 또한 新羅兵을 徵하여 多谷海谷의 二道로 하여셔 平壤에서 만나게 하다 8월에 新羅王은 金庾信등 三十將軍을 領하고 京(신라의서울)을 출발하여 漢城(지금의 廣州)에 行하다. 9월에 李勣은 新城을(고구려의 西쪽 城) 무너뜨리고 글필하력(契苾何力)으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하다 李勣이 遼를(요동지방) 처음 건너감에 諸將에게 말하대 新城은(고구려의 西쪽 城) 고구려의 西쪽의 要塞라 우선 이를 얻지 못하면 나머지 城을 얻기 어렵다 하고 드디어 이를 공격하니 城의 사부구(師夫仇)가 城主를 포박(捕縛)하여 城門을 열고 항복(降伏)하는지라 이적(李勣)이 兵을 이끌고 나아가 十六城을 攻擊하여 모두 이를 항복(降伏)시키니라. 방동선(龐同善) 營州 都督 고간(高侃)은  新城에 尙在할새(아직도 있다)  男建이 兵을 보내어 그 營을 습격(襲擊)하니 좌무위장군 설인귀(左武衛將軍 薛仁貴)가 攻擊하여 이를 파(破)한지라 고간(高侃)은 진격(進擊)하여 金山에 至하여 高句麗軍과 一戰하여 不利하고 高句麗軍이 승승(乘勝)하여 드디어 北쪽으로 가니 설인귀(薛仁貴)는 兵을 후퇴시켜 이를 橫擊하여(옆으로 공격하여) 참수(斬首) 오만여급(五萬餘級)을 하고 南소(魚禾) 木底 창암(蒼巖)의 三城을 무너뜨리고 男生의 軍과 合하니라. 곽대봉(郭待封)은 水軍으로 써 別道로부터 平壤으로 가고 李勣은 別將 빙사본(憑師本)을 파견하여 糧仗(양식과 병장기)를 싣고 가라 하였는데 憑師本의 배가 破하여 시기를 놓쳤는지라  郭待封의 軍中이 굶주려 편지를 써서 李勣에게 주고저 하나 편지를 빼앗길까  두려워 이합시(離合詩)를 쓰서 李勣에게 보내니라 離合詩라함은 字劃을 끊고 뿌러뜨려 이를 합하면 文章이 되게 하는 것인데 李勣이 怒하여 軍事가 火急하거늘 무슨 詩 따위를 쓰는가하고 이를 必斬하리라하니 行軍管記通事舍人 元萬頃이 이를 위하여 그것을 解釋하는지라 李勣이 다시 糧仗을  보내니 元萬頃이 檄文을 만들어 가로대 鴨綠江의 險을 지킬줄 왜 모르는가 한 대 男建이 報하여 가로대 命을 삼가 듣겠나이다하고  兵을 鴨綠江으로 옮기니 唐兵이 鴨綠江을 거너지 못하여 帝가 이를 듣고는 元萬頃을 嶺南에 流配하니라. 석處俊은 安市城밑에 있어 미쳐 隊列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고구려군 三萬이 掩襲하여 軍中이 크게놀라더라 석處俊이 胡床에 居하여 마른 음식을 먹다가 精銳를 엿보아 이를 擊破하니 壯士가 그 膽力에 놀라더라.  9월에 新羅王이 漢城에 至하여 李勣을 기다리고 10월에 李勣은 平壤北쪽 200里에 至하여 爾同兮村主 大奈麻江深을 파견하여 契丹騎兵 八千을 率하고 아진함성(阿珍含城)을 지나 漢城에 至한후 書信을 보내어 兵期를 독촉(督促)하니 新羅王이 이에 따르다. 11월에 장새(獐塞)에 至하여 李勣이 돌아감을 알고 新羅王도 돌아가다. 唐이 將軍 劉仁願을 남아서 鎭壓케하고 新羅王에게 명하여 援助하여 고구려를 征服케하고 大將軍의 旌節을 賜하다.


신라문무왕(新羅文武王) 6년 고구려 보장왕(高句麗 寶藏王) 25년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死하고 長子 男生이 막리지(莫離支)가 되다. 초에 國政을 知하고 出하여 제성(諸城)을 순시(巡視)할새 그 동생 남건(男建)과 남산(男産)등으로 하여금 후사(後事)를 부탁하니 혹자(或者)가 이들 두 兄弟에게 이르기를 男生은 두 동생을 싫어하여 이를 제거(除去)코저 한다하고 또 男生에게 고(告)하는자(者)  있어 가로대 동생들은 형이  돌아와 권세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거절(拒絶)하고 불납(不納)코저한다 하고 남녀 소친(所親)을(가까운사람) 잠견(潛遣)(비밀히 파견하다)하여 이를 살피게 한데 이내 王命으로서 男生을 소환(召喚)하니 공구(恐懼)하여(두려워하여) 감히 불귀(不歸)하더니 男建이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兵을 발하여 이를 토(討)하니 男生이 주(走)하여(달아나다) 國內城에 居하고 그 아들 헌(獻)으로 하여금 唐나라에 보내어 도움을 청한데 6월에 唐高宗은 좌효위(左驍衛)대장군(大將軍) 글필하력(契苾何力)에게 命하여 兵을 주어 이를 도웁게 하니 男生이 몸을 빼어내어 唐나라에 분(奔)하니라(도망가다) 唐高宗이 이를 불러 특진 요동 도독겸(特進 遼東 都督 兼) 평안도(平安道) 안무대사(按撫大使)를 수(授)하니라. 新羅 文武王이 이미 百濟를 平定하고 高句麗를 멸(滅)하고저 兵을 唐에 청하니 十二月에 이적(이세적)(李勣)(李世勣)으로서 요동도행군(遼東道行軍) 대총관 겸(大摠管 兼) 안무대사(按撫大使) 를 위(爲)하고 사열소상(司列少常) 백안륙(伯安陸) 석처준(석處俊)으로 부(副)로하고 방동선(龐同善) 글필하력(契苾賀力)은 병(並)히 요동도행군(遼東道行軍) 부대총관(副大摠管) 겸(兼) 안무대사(按撫大使)로 爲하여  그 수륙제군총관(水陸諸軍摠管)  및 전랑사(轉粮使) 실의적(實義積)독고경( 獨孤卿) 운곽(雲郭) 대봉등(待封等)은 나란히 이적(李勣)의 처분(處分)을 受하여 河北諸州의 조세(租稅)와 부역(賦役)을  모두 요동(遼東)으로 돌려 軍用으로 쓰게 하니라. 

고구려의 멸망전후 십년의 이야기(2)

신라 문무왕2년 고구려 보장왕21년 春正月에 당나라 使臣 신라에 至하여 前王을 제사(祭)케하고 왕을 冊하여 개부 의동 삼사 상주국 낙낭군공 신라왕(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公 新羅王)으로 爲하고 잡채(雜綵)500단(端)을 사(賜)하다.

 金庾信 金仁問 眞服 良圖등 아홉 將軍을 유진 劉仁願과 兵 數萬 車 二千餘輛으로 米 四千石 租 二萬二千石을 싣고 平壤으로 풍수촌(風樹村)에 至하니 얼음이 미끄럽고 길이 험하여 차로 갈 수 없더라. 牛馬를타고 七重河에 이르니 사람이 모두 강 건너감을 두려워하는데 김유신이 먼저 건너감에 군사들이 모두 건너가 고구려 국경에 들어가 산양(蒜壤)에 至하니 사람들이 모두 피곤해 하니 김유신이 諸將에게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 두나라는 대대로 우리의 원수라 죽음을 겁내지 말고 원수를 갑고자 하나니 제군은 可勉할지라 이에 平壤으로 직행하여 고구려 군사와 이현(梨峴)에서 만나 이를 이기니라.唐의 옥저(沃沮) 도총관(都摠管) 방효태(龐孝泰) 고구려와 싸우다가 패하여 死하다. 초에 방효태(龐孝泰)는 사수(蛇水)에서 水戰의 兵士를 이끌고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군사와 싸워 大敗하고 그는 兩代에 걸처 사사(仕事)함으로 은혜(恩惠)를 입었으니 고구려군을 滅치 않으면 不還이라하고 淵蓋蘇文이 육박(肉薄)하여 공(攻)하니 死하는자 누만(累萬)이라 그 子 十三人과함께 개사(皆死)하다.

 2월에 唐의 요동 도총관(遼東 都摠管) 소정방(蘇定方)이 平壤의 포위(包圍)를 풀고 兵을 끌고 돌아가다.先時에 金庾信등이 장색도의 險에 至함에 平壤을 距하기 數里요 심한 風雪을 만나 凍死者가 생기니 김유신이 어깨에 책(策)을 메고 前進하니 병사들이 死力을 다하여 액(扼)을 克服하니라 김유신이 唐軍이 굶주림에 우선 步騎監 열기(裂起)와 軍官 구근(仇近)을 파견하여 唐營에 報케하니 蘇定方이 書信으로 感謝하더라 열기(裂起)돌아옴에 김유신이 기뻐하여 급찬(級湌)으로 하게하고 金庾信이 金仁問 良圖 및 子의 軍勝을 파견하여 唐營에 軍糧을 보내고 蘇定方에게 銀紬布頭髮 牛黃등의물을 증(贈)하니라 良圖는 兵800으로 바다로 해서 돌아오고 김유신도 돌아오니 고구려군이  伏兵으로 치는지라 김유신이 북을 소 허리에 달고 부자를 소 꼬리에 딸아 진격하여 소리나게하고 섶을 쌓고 불을 질러 연기를 내어 野營하는척 하고 夜半에 潛行하여 河를 건너 兵을 休息하고 翌朝에 고구려병이 追擊할제 김유신이 萬弓을 發하여  고구려군을 격퇴하니 추격하여 斬首萬餘級에 五千人을 捕虜로하니라 왕이 기뻐하여 論功하고 김유신이 왕에게 裂起 仇近은 天下勇士라 급찬(級餐)이 未副하여 사찬(沙湌)에 加하소서 하니 왕이 이를 따르니라 춘삼월에 신라왕이 백제가 평정됨으로서 대사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큰

고구려는 어떻게 멸망해갔나?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사망을 전후하여 신라 문무왕의 즉위로부터 문무왕8년에 당나라의 이적장군에게 고구려 보장왕이 백기를 들고 항복할 때까지 약 10년동안의 역사를 10회 정도로 나누어 간략히  간추려 본다.문무왕 원년 보장왕 20년8월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패강(浿江) 마읍산(馬邑山)을 파(破)하고 平壤城을 포위하다.신라왕이 당병(唐兵)과 합할려고 제장(諸將)을 이끌고 웅현(熊峴)에 이르러 백제의 옹산성(甕山城)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다.백제유민이 옹산성(甕山城)에 거한데 왕이 먼저 항복을 권하나 듣지않고 김유신이 옹산성(甕山城)을 포위하여 너이들이 고성(孤城)을 홀로지켜  무엇하느냐하고 항복을 권하나 듣지않자 김유신이 웃으며 말하대 곤수(困獸)도 유투(猶鬪)라 (곤경에 처한 짐승도 오직 싸운다)하더라.성을 포위하여 9일에 왕이 총관(摠管)을 불러 모아 눈물을 흘리니 군사들이 모두 분투하더라 드디어 왕의 군사와 김유신(金庾信)의 군사가 합하여 대책(大冊)을 불태우고 數千의 兵을 참(斬)하고 적장(敵將)을 살육하다. 신라 상주총관(上州摠管) 품일(品日)이 병을 이끌고 백제의 우술성(右述城)을 공격하여 천여급(千餘級)을 참하니 달솔조복(達率助服) 은솔파가(恩率波伽)등이 항복하니라  왕이 조복(助服)에게 급식을 사하고 고타야군(古阤耶郡)太守를 수하고 파가(波伽)에게는 급식을 수하고 田宅衣物을 사(賜)하다. 신라왕이 소정방(蘇定方)에게 대감(大監) 문천(文泉)을 파견한데 소정방(蘇定方)이 가로대 왕명을 받아 적을 토벌하고저 바다를 건너 萬里를 왔는데도 신라는 원병(援兵)을 보내지 않고 식량도 이어지지 아니함은 어쩐일이오 하니  왕이 군신으로 敵境에 深入하여 식량을 원수(遠輸)하므로(멀리수송하므로) 위난이라하니 김유신(金庾信)왈 신이 중책을 맡아 비록 죽어도 불사하니 蘇定方의 비위를 맞추어 보겠다하니 왕이 기뻐하며 경(卿)을 얻어 걱정이 없다하더라. “신라의 강토를 나온후에는 경이 편할대로 하라”하더라.   연개소문이 그아들을 男生을  파견하여 정병 數萬으로 鴨綠江을 지켜 唐兵이 江을 건너지 못하더라. 글필하력(契苾何力)이 至함에 얼음이 얼어 얼음을타고 江을 건너 進하니 고구려 분궤(奔潰)라 三萬을 殺하고 男生은 겨우 한몸으로 도망하니라.冬 10월에 唐이 使臣을 파견하였으나 왕이 만나지못하고 돌아오며 金庾信이 兵을 休하고 平壤에 軍糧을 보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