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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3세 대무신왕의 조 (부여의 대소왕의 침입과 죽음)

zarashin 2007. 3. 12. 14:37

고구려 3세 대무신왕의 조(부여의 대소왕의 침입과 죽음)

 

고구려 대문신왕은 유리왕의 셋째아들이니 어려서 총명하고 장이웅걸하고 태략이 유하더라

유리왕 재위 33년 갑술에 태자가 되니 나이는 11세더라. 모는 송씨이니 다물국왕 송양의 여라. 대무신왕 3년3월에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묘를 입하다. 추9월에 왕이 골향천에 수렵을 나갔다가 신마를 구하여 거루라고 이름짓다 동 10월에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어 적조를 보내니 일두에 이신이라 초에 부여인이 이를  얻어 왕에게 바치니 혹자는 말하대 까마귀는 본래 흑색인데  변색하여 빛이 붉게 되었으니 이는 남방지색이라 적조는 서물이거든 어찌 군이 가지지않고 나에게 보내니 양국이 존망은 아직 판단할 수 없다 한지라 대소가 이를 듣고 놀라며 후회하더라. 고구려 대무신왕 원년 3월에 고구려왕이 부여왕 대소를 치다. 선시에 고구려왕이 리물림에 갔다가 야밤에 쇠소리를 듣고 수색하여 금이병기를 얻어 하늘이 내린 것이라 하고 배수하다. 도중에 한사람을 만나니 신장이 구척이요 안면이 희고 안광이 유한지라 왕을 배하고 가로대 신은 북명지인 괴유요 듣건데 대왕께서 부여를 북벌한다하시니 청컨데 신이 종행하여 부여왕의 수급을 취하리다 왕이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다. 이때 부여국 남방으로 진하니 그 땅은 뻘빹이라 왕이 평지를 택하여 건영하고 해안휴졸하니 부여왕이 군졸을 이끌고 진두에 서서 출전할 새 그 불비를 공격코저하여 말을 달려 분진하다가 이탁(뻘밭)에 함하여 진퇴를 자유롭개 못하거늘 고구려왕이 괴유를 휘진하니 괴유 칼을 뽑아 호공격지한데 적이 대응하지 못하거늘 괴유 직진하여 부여왕의 두를 참하였으나 부여인이 불굴하고 고구려병을 포위한것이 수만이라 고구려왕이 양진사기(양식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굶주려)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더니 홀연 큰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기를 7일이라 왕이 명하여 허수아비를 만들어 병기를 집게하고 영문 내외에 진열하여 의병을 만들고 간도로 잠군하여 야간에 빠저나오다 돌아와 군신과 회음하고 가로대 내가 부덕하여 경솔히 부여를 벌하여 그왕을 비록 죽였으나 그 나라를 망하게 하지못하고 아군의 군자를 많이 잃었으니 이는 과인의 우라하고 친히 조사하며 질고를 문하여서 백성을 위문하니 국인이 크게 감복하니라.                                    

출처 : 임경택의 블로그
글쓴이 : 임경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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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2世 琉璃王의 조 ;

琉璃王 26년 3월에 고구려 太子 解明이 黃龍國에 갔다오다 王이 遷都코저 하였으나 太子가 따르지 않고 舊都에 머물다. 黃龍國王이 使臣을 보내어 큰활을 贈與하다 太子 解明이 그활을 뿌러떠리고는 强한 활이 아니라하다. 高句麗王이 이를 듣고는 大怒하여 解明은 不孝하니 寡人을 위하여 이를 誅하소서 하다. 黃龍王이 使者를 보내어 相見하기를 請하고 太子가 갈려고하나 말리는자가 있어 太子가 가로대 하늘이 나를 죽이려아니하거늘 黃龍王이 무엇인고 하고 드디어 가니 黃龍王이 敢히 害하지 못하고 禮로서 返送하니라. 고구려 琉璃王 28년에 高句麗王이 解明에게 사람을 보내어 遷都함은 百姓을 便安케하려 함인데 너는 나를 따르지않고 이웃나라에 怨讐를 맺느냐 하며 劍을 下賜하니 스스로 죽어라 함이라. 太子가 自殺코저하나 어떤이가 말리며 大王의 長男이 卒하고 太子가 이를 이어야 하거늘 어찌 自殺코저하느냐 太子曰 내가 强弓을 뿌러터린 것은 그 나라를 無視하고 한 것이 아니거늘 父王에게 得策하고 父王이 나에게 不孝라하여 劒으로 自殺하라하니 어찌 父命을 어기리오 하고 乃礪津 東原에 往 하여 창을 땅에 꽂아놓고 말을 달려 창에 찔려 죽으니 그때 나이는 21세라 太子의 禮로서 葬事 지내다.

고구려 琉璃王 37년에 夏4월에 王子 赴津에서 溺死하니 屍體를 求하지 못하다가 沸流人 祭須가 屍身을 얻어 드디어 禮로서 王骨嶺에 葬하고 祭須에게 金 10斤과 田 10頃을 下賜하다. 秋7월에 王이 豆谷에 幸行 갔다가 冬 10월에 豆谷離宮에서 몽하니 東谷東原에 葬하고 琉璃王이라 諡號하고 太子 無恤이 새王으로 立하다.

 

高句麗 3世 大武神王의 朝(扶餘의 대소왕(帶素王)의 침입(侵入)과 죽음)

 

高句麗 大武神王은 유리왕(琉璃王)의 셋째 아들이니 어려서 총명(聰明)하고 장이웅걸(壯而雄傑)하고 太略이 有하더라

유리왕(琉璃王) 在位 33년 갑술(甲戌)에 太子가 되니 나이는 11歲더라. 母는 松氏이니 다물국왕(多勿國王) 송양(松讓)의 女라. 大武神王 3년3월에 高句麗 始祖 東明王의 묘(廟)를 건립(立)하다. 秋9월에 王이 골향천(骨向川)에 수렵(狩獵)을 나갔다가 神馬를 求하여 거루(駏䮫)라고 이름짓다 冬 10월에 扶餘王 대소(帶素)가 使臣을 보내어 赤鳥를 보내니 一頭에 二身이라 初에 扶餘人이 이를  얻어 王에게 바치니 혹자(或者)는 말하대 까마귀는 본래 黑色인데 변색(變色)하여 빛이 붉게 되었으니 이는 南方之色이라 赤鳥는 瑞物(상서로운 물건)이거든 어찌 君이 가지지 않고 나에게 보내니 兩國이 存亡은 아직 判斷할 수 없다 한지라 대소(帶素)가 이를 듣고 놀라며 후회(後悔)하더라. 高句麗 大武神王 元年 3월에 高句麗王이 扶餘王 대소(帶素)를 치다. 선시(先是)에 高句麗王이 리물림(利勿林)에 갔다가 夜밤에 쇠소리를 듣고 수색(搜索)하여 금이병기(金爾兵器)등을  얻어 하늘이 내린 것이라 하고 배수(拜受)하다. 도중에 한사람을 만나니 身長이 九尺이요 顔面이 희고 眼光이 有한지라 王을 拜하고 가로대 臣은 북명지인(北溟之人) 괴유(怪由)요 듣건데 大王께서 扶餘를 북벌(北伐)한다 하시니 청(請)컨데 臣이 종행(縱行)하여 扶餘王의 수급(首級)을 취(取)하리다 王이 기뻐하며 이를 허락(許諾)하다. 이때 夫餘國 南方으로 進하니 그 땅은 뻘밭이라 왕이 平地를 擇하여 建營하고 해안휴졸(解鞍休卒)하니 扶餘王이 軍卒을 이끌고 진두(陳頭)에 서서 出戰할 새 그 불비(不備)를 공격(攻擊)코저하여 말을 달려 분진(奮進)하다가 泥탁(뻘밭)에 함(陷)하여 進退를 自由롭  게 못하거늘 고구려왕이 괴유(怪由)를 휘진(揮進)하니 怪由 칼을 뽑아 호공擊之한데 적(敵)이 대응(對應)하지 못하거늘 怪由 直進하여 扶餘王의 頭를 참(斬)하였으나 扶餘人이 불굴(不屈)하고 高句麗兵을 포위(包圍)한 것이 數萬이라 高句麗王이 양진사기(糧盡士飢)(양식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굶주려)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더니 홀연(忽然) 큰 안개가 끼어 지척(咫尺)을 분간하지 못하기를 7日이라 王이 命하여 허수아비를 만들어 兵器를 잡게하고 營門 內外에 陳列하여 疑兵을 만들고 사이 길로  潛軍하여 夜間에 빠저나오다 돌아와 群臣과 會飮하고 가로대 내가 不德하여 경솔(輕率)히 扶餘를 벌(伐)하여 그 王을 비록 죽였으나 그 나라를 亡하게 하지못하고 我軍의 軍資를 많이 잃었으니 이는 과인(寡人)의 과오(過誤)라 하고 親히 弔死하며 질고(疾苦)를 問하여서 百姓을 위문(慰問)하니 國人이 크게 감복(感服)하니라.

(2)   高句麗 3世 大武神王의 朝 (계속)

(가)   부여왕 帶素의 侵入과 죽음

(나)   漢나라의 遼東太守의 高句麗 侵入

(다)   王子 好童의 이야기  (계속)

 

高句麗의 滅亡前後 十年의 이야기(6)

男建은 閉門拒守하고 兵을 出戰하나 모두 敗하는지라 軍事로서 부도(浮屠) 신성(信誠)을 위탁(委託)하니 信誠은 소장(小將) 오사요묘(烏沙饒苗)와 공히 사람을 밀견(密遣)하여 내응(內應)할것을 이적(李勣)에게  고(告)하고 5일후에 信誠은 城門을 여는지라 李勣이 兵을 따라 城에올라 북을 치며 불을 지르니 男建은 自殺코저 하나 이루지 못하고 王과 王子 복남(福男) 大臣 남건(男建)등 二十餘萬은 포로(捕虜)로하고 金仁問 아찬(阿餐) 조주(助州)는 李勣을 따라 唐으로 가니라 新羅王은 唐兵이 고구려를 平定함을 듣고 平壤으로 가고저 漢城을 出發하여 분차당(肦次塘)에 갔더니 唐兵이 이미 돌아감을 듣고 漢城으로 돌아가 제장(諸將)의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다. 10월에 李勣이 돌아올새 唐主는 李勣에게 命하여 軍容을구비(具備)하고 개가(凱歌)를 올리게하고 高句麗王으로하여금 태묘(太墓)와 소능(昭陵)에 헌(獻)하게하다 12월에 高句麗王을 사(赦)하여 司平大常伯員外同正으로 爲하고 남산(男産)으로서 사재소경(司宰小卿)으로 위(爲)하고 승(僧)신성( 信誠)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위(爲)하고 남생(男生)을 우위(右衛)大將軍으로 爲하고 男建을 금주(黑今 州)에 유배(流配)하여 사사(賜死)하고 五部百七十六城六十九만호(萬戶)를 分하여 九部督府四十二州百현(縣)으로 爲하고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平壤)에 치(置)하여이를 통(統)케하고 新羅의 장수(將帥)중 有功한 者를 도호자사(都護刺史)현령(縣令)으로 爲하여 唐人과 共히 참여(參與)하여 치(治)케하고 우위위(右威衛)大將軍 설인귀(薛仁貴)로서 검교(檢校)안동도호(安東都護)로 爲하고 兵二萬으로 진무(鎭撫)케하다. 文武王10년 高句麗 수림성(水臨城)의 사람 모잠(牟岑)은 잔민(殘民)을 수습(收拾)하고 궁모성(窮牟城)에서 패강(浿江) 南에 지(至)하여 唐의 官人을 殺하고 新羅로 向할 새 西海의 사야도(史冶島)에 至하여 안승(安勝)을 見하고 영(迎)하여 漢城에 置하고 소형다식(小兄多式)등을 新羅에 보내어 告하여 가로대 멸국(滅國)은 興하고 절세(절世)는 계(繼)함은 天下의 공의(公義)이니(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大國에 이를 희망(希望)하노니 我國 先王인 장(藏)은 道를 失하여 滅亡하니 지금 臣等이 宗族 安勝을 얻어 奉以爲君(임금으로 삼다)하였으니 원컨데 번병(藩屛)이되어 永世에 忠을 다하리다하여 新羅王은 此馬國西의 舍를 저(渚)(지금의 益山郡) 에 치하니 唐主는 大將軍 고간(高侃)을 遣하여 동주도행군 총관(東州道行軍 摠管)으로 爲하여 이를 토벌(討)케하다 安勝은 모잠(牟岑)을 살(殺)하고 新羅에 분(奔)하니 新羅王이 使를견(遣)여 책명(책命)하여  安勝을 封하여 高句麗王으로 爲하다.

文武王 11년에 고간은 高句麗의 餘衆을 安市城에서 破하다. 文武王 12년 고간(高侃)이 고구려인과 白水에서 戰하여 此를 破하니 新羅는 兵을 派遣하여 高句麗를 救하는지라 고간(高侃)이 이를 격(擊)하여 이기고 포로를 二千하다 文武王 13년에 연산도총관(燕山道摠管) 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은 고구려인을 호려하(瓠濾河)에 破하니 (七重城의 北에 있으니 七重城은 지금의 적성현(積誠縣) 捕虜 數千하고 여중(餘衆)은 모두 新羅로 逃亡가다. 의봉(儀鳳)2년에 唐은 高句麗王이던 藏으로 하여금 요동군 도독(遼東郡 都督)으로 爲하여 朝鮮王으로 봉(封)하고 요동(遼東)으로 돌아오게 하여 여중(餘衆)을 안집(安輯)케하고 諸州에 있는자 모두 王과함께 돌아오게하고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이를 통(統)케하니 王은 遼東에 至하여 모반(反)을 도모(謀)하고 말갈(靺鞨)과 잠통(潛通)하다.개요(開曜)元年에 召喚하여 공주(邛州)에 還케하였더니 永淳의 初로서 死한지라 위위경(衛尉卿)을 증(贈)하고 경사(京師)에 송지(送至)하여 힐리묘(頡利墓)의 左에 장(葬)하고 비(碑)를 세우다 구성(舊城)은  와왕(往往) 新羅에 몰수(沒收)되고 여중(餘衆)을 散하여 말갈(靺鞨)과 돌궐(突厥)에 入하니 高句麗는 드디어 滅하다. (계속)

 

寶藏王 27년 文武王 8년 唐은 右相 유인궤(劉仁軌)로서 遼東道行 副大摠管으로 爲하고 석처준(處俊) 金仁問을 차에 副로하다 2월에 이적(李勣)등이 扶餘城을 무너뜨리니 이때 高句麗의 扶餘城 薛仁貴가 이미 高句麗軍을 金山에 破하고 승승(乘勝)하여 3000인에 將이 되어 扶餘城을 장차 攻擊하고저 한지라 諸將이 그 兵이 적음으로 이를 말리더니 薛仁貴 가로대 兵은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어떻게 잘 쓰느냐에 달렸느니라 하고 이미 先鋒이 되어 行軍하는지라 高句麗軍과 싸워 大破하는지라 萬餘名을 殺하고 이미 扶餘城을 깨뜨렸으니 扶餘川중의 40餘城이 모두 바람 보듯이 하여 降伏하니라 가언충(賈言忠)이 遼東으로부터 돌아옴에 唐나라임금이 묻되 軍中이 무어라 하던가 하니 대답하여 왈 반드시 이긴다하더이다. 唐王이 가로대 경(卿)은 어떻게 이를 아느뇨한데 대답하여 가로대 수(隨)나라 양제(煬帝)가 東征하여 이기지 못함은 民心이 떠났음이요 앞의 임금이 征伐하여 이기지 못함은 高句麗와 아무 연결이 없음이니 지금 高句麗의 寶藏王이 微弱하여 權臣을 다스리지 못하고 淵蓋蘇文이 죽어 男建 兄弟가 서로 싸워 男生은 마음을 돌려 唐나라에 붙어 향도(嚮導)의 역할을 하고 그가 情勢를 판단하여 모르는 것이 없어 陛下의 밝은 玉座에서 國家는 富强하고 將軍과 兵士들이 힘을 다하여 高句麗의 亂에 임한즉 그 勢가 반드시 이겨 다시 싸울 것이 없나이다. 또한 高句麗 비기(秘記)에 (고구려의 미래를 예언하는 책)이르기를 高句麗는 900년에 이르지 못하고 의당 80의 大將이 有하여 이를 可滅이라하고 高씨는 漢나라로 부터 나라를 가짐에 900년이 되리라하고 李勣의 나이 80이라 사람들이 항상 약탈하고 땅은 갈라지고 여우와 시랑이가 城안으로 들어오고 두더지는 문에 구멍을 내고 人心이 위태로와 그 亡함을 미리 예칙(豫測)할 수 있느니라 하니 唐나라 王이 그말은 깊은도다 하다. 男建이 兵5만을 派遣하여 扶餘城을 救하고 李勣등과 설하수(薛賀水)에 만나 戰爭할 새 敗死者는 3萬餘라 李勣이 나아가 大行城을 攻擊하다. 6월에 劉仁軌는 칙서(勅書)를(임금의 서신) 받고 숙위 金三光과 함께 당정양(黨頂洋)에 도달하니 新羅王은 角干 金仁問을 派遣하여 이를 迎接하니라 高句麗 漢城등 22郡 12城을 約束하여 김인궤에 降伏하니 金仁軌 使臣을 派遣하여 이를 告하니라.新羅王은 길찬진공(吉餐眞功)을 派遣하여 칭하(稱賀)하고 대동총관(大憧摠管) 金仁問 천존 漢城仁行軍 摠管 도유(都儒) 등을 파견하여 一善州等 7郡(一善州는 지금의 慶北 善山郡) 및 漢城州의 兵을 領하고 爲先 唐軍의 營으로가니라 新羅王은 계속하여 命令을 제도도총관(諸道摠管)에게 발하여 兵을 領하고 이에 따르게하니 金仁問등은 李勣을 만나 軍을 嬰山밑으로 進하다. (西京의 북 이십리에 재함)7월에 新羅王은 漢城州에 와서 諸摠管으로 唐軍을 만나게하니 문영(文潁)등은 고구려병과 蛇川原에서 만나 이를 大破하니라 李勣이 이미 大行城에서 이기고 他道로 나간자도 모두 李勣과  만나 前進하니 高句麗軍이 對戰하나 李勣등이 이를 破하고 追擊하다가 욕이성(辱夷城)을 무너뜨리니 여러성이 逃亡하여 降伏하는자 많더라 글필하력(契苾何力)은 위선 병을 빼고 平壤城 밑으로 이르고 李勣등이 뒤를 이어 平壤城을 달포 넘게 포위(包圍)하니 高句麗王이 男産을 派遣하여 首領 98人을 이끌고 白旗를 들고 李勣에게 항복(降伏)하는지라 李勣은 예(禮)로서 이를 맞이하니라.


 


고구려 멸망 전후 십년의 이야기(5)
2007.03.01 22:35

보장왕 27년 문무왕 8년 당은 우상 유인궤로서 요동도행 부대총관으로 위하고 석처준 김인문을 차에 부로하다 2월에 이적등이 부여성을 무너뜨리니 이때 고구려의 부여성 설인귀가 이미 고구려군을 감산에 파하고 승승하여 3000인에 장이 되어 부여성을 장차 공격하고저 한지라 제장이 그 병이 적음으로 이를 말리더니 설인귀 가로대 병은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어떻게 잘 쓰느냐에 달렸느니라 하고 이미 선봉이 되어 행군하는지라 고구려군과 싸워 대파하는지라 만여명을 살하고 이미 부여성을 깨뜨렸으니 부여천중의 40여성이 모두 바람 보듯이 하여 항복하니라 가언충이 요동으로부터 돌아옴에 당나라임금이 묻되 군중이 무어라 하던가 하니 대답하여 왈 반드시 이긴다하더이다. 당왕이 가로대 경은 어떻게 이를 아느뇨한데 대답하여 가로대 수나라 양제가 동정하여 이기지 못함은 민심이 떠났음이요 앞의 임금이 정벌하여 이기지 못함은 고구려와 아무 연결이 없음이니 지금 고구려의 보장왕이 미약하여 권신을 다스리지못하고 연개소문이 죽어 남건 형제가 서로 싸워 남생은 마음을 돌려 당나라에 붙어 향도의 역할을 하고 그가 정세를 판단하여 모르는 것이 없어 폐하의 밝은 옥좌에서 국가는 부강하고 장군과 병사들이 힘을 다하여 고구려의 난에 임한즉 그세가 반드시 이겨 다시 싸울 것이 없나이다. 또한 고구려 비기에 (고구려의 미래를 예언하는 책)이르기를 고구려는 900년에 이르지못하고 의당 80의 대장이 유하여 이를 가멸이라하고 고씨는 한나라로 부터 나라를 가짐에 900년이 되리라하고 이적의 나이 80이라 사람들이 항상 약탈하고 땅은 갈라지고 여우와 시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오고 두더지는 문에 구멍을 내고 인심이 위태로와 그 망함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느니라 하니 당나라 왕이 그말은 깊은도다하다. 남건이 병5만을 파견하여 부여성을 구하고 이적등과 설하수에 만나 전쟁할 새 패사자는 3만여라 이적이 나악 대행성을 공격하다. 6월에 유인궤는 칙서를(임금의 서신) 받고 숙위 김삼광과 함께 당정양에 도달하니 신라왕은 각간 김인문을 파견하여 이를 영접하니라 고구려 한성등 22군 12성을 약속하여 김인궤에 항복하니 김인궤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고하니라.신라왕은 길찬진공을 파견하여 칭하하고 대동총관 김인문 천존 한성인 행군 총관 도유 등을 파견하여 일선주등 7군(일선주는 지금의 경북 선산군) 및 한성주의 병을 령하고 위선 당군의 영으로가니라 신라왕은 계속하여 명령을 제도총관에게 발하여 병을 령하고 이에 따르게하니 김인문등은 이적을 만나 군을 영산밑으로 진하다. (서경의 북 이십리에 재함)7월에 신라왕은 한성주에 와서 제총관으로 당군을 만나게하니 문의등은 고구려병과 사천원에서 만나 이를 대파하니라 이적이 이미 대행성에서 이기고 타도로 나간자도 모두 이적과  만나 전진하니 고구려군이 대전하나 이적등이 이를 파하고 추격하다가 욕이성을 무너뜨리니 여러성이 도망하여 항복하는자 많더라 글필하력은 선병을 이끌고 평양성 밑으로 이르고 이적등이 뒤를 이어 평양성을 달포 넘게 포위하니 고구려왕이 남산을 파견하여 수령 98인을 이끌고 백기를 들고 이적에게 항복하는지라 이적은 예로서 이를 맞이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