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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 2세 유리왕의 조

zarashin 2007. 3. 12. 14:36
 

(1)

 

高句麗 2世 琉璃王의 조 ;

琉璃王 26년 3월에 고구려 太子 解明이 黃龍國에 갔다오다 王이 遷都코저 하였으나 太子가 따르지 않고 舊都에 머물다. 黃龍國王이 使臣을 보내어 큰활을 贈與하다 太子 解明이 그활을 뿌러떠리고는 强한 활이 아니라하다. 高句麗王이 이를 듣고는 大怒하여 解明은 不孝하니 寡人을 위하여 이를 誅하소서 하다. 黃龍王이 使者를 보내어 相見하기를 請하고 太子가 갈려고하나 말리는자가 있어 太子가 가로대 하늘이 나를 죽이려아니하거늘 黃龍王이 무엇인고 하고 드디어 가니 黃龍王이 敢히 害하지 못하고 禮로서 返送하니라. 고구려 琉璃王 28년에 高句麗王이 解明에게 사람을 보내어 遷都함은 百姓을 便安케하려 함인데 너는 나를 따르지않고 이웃나라에 怨讐를 맺느냐 하며 劍을 下賜하니 스스로 죽어라 함이라. 太子가 自殺코저하나 어떤이가 말리며 大王의 長男이 卒하고 太子가 이를 이어야 하거늘 어찌 自殺코저하느냐 太子曰 내가 强弓을 뿌러터린 것은 그 나라를 無視하고 한 것이 아니거늘 父王에게 得策하고 父王이 나에게 不孝라하여 劒으로 自殺하라하니 어찌 父命을 어기리오 하고 乃礪津 東原에 往 하여 창을 땅에 꽂아놓고 말을 달려 창에 찔려 죽으니 그때 나이는 21세라 太子의 禮로서 葬事 지내다.

고구려 琉璃王 37년에 夏4월에 王子 赴津에서 溺死하니 屍體를 求하지 못하다가 沸流人 祭須가 屍身을 얻어 드디어 禮로서 王骨嶺에 葬하고 祭須에게 金 10斤과 田 10頃을 下賜하다. 秋7월에 王이 豆谷에 幸行 갔다가 冬 10월에 豆谷離宮에서 몽하니 東谷東原에 葬하고 琉璃王이라 諡號하고 太子 無恤이 새王으로 立하다.

 

(2)   高句麗 3世 大武神王의 朝 (계속)

(가)   부여왕 帶素의 侵入과 죽음

(나)   漢나라의 遼東太守의 高句麗 侵入

(다)   王子 好童의 이야기  (계속)


출처 : 임경택의 블로그
글쓴이 : 임경택 원글보기
메모 :
고구려 건국 신화 (주몽이야기) (1)
2007.02.23 21:49

 

나의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한권의 역사책이 있어 그것을 연속극 “주몽”이와 비교하여 보았다. 그 역사책이 어느 정도의 신뢰성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으나 해방직후 나의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이신 조섭제 (조향)선생님(후일 동아대학교수)으로부터 배운 기억과 거의 같아 한문 투성이의 이 책을 정밀 분석하여 주몽이의 실체에 나 나름대로 접근해 보고 자한다.


(扶餘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연로(年老)하여 무자(無子)한지라 山川에 제사하고 후사(後嗣)를 구하더니 타고 가는 말이 하나의 연못에 이르러 큰돌(大石)을 발견하고 콧소리를 내니 괴이하게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돌을 치워보니 아이가 하나 있어 이름을 지어 금와(金蛙)라 하였고 금색의 개구리 모양을 하고 있어 왕이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나에게 영륜(令륜)(남의 아이)을 하사(下賜)하신 것이라 하고 이를 길러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장성하여 태자(太子)로 봉하였다. 그 후에 승상 아란불(阿蘭弗)이 가로대 꿈에 천제(天帝)께서 나에게 이르되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게 하리라. 하니 너이는 이를 피하라.

東海바닷가에 한 땅이 있어 가엽원(加葉原)이라하고 토양이 살찌고 오곡이 자라는데 적당하니 가히 도읍지라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옮겨 나라를 동부여(東扶餘)라 하다.

그 구(舊) 도읍지에 사람이 있어 자칭 天祭의 아들 해모수(解慕潄)라하고 도읍으로 오니라 해부루(解夫婁)가 몽함에 (몽은 임금이 죽음)금와(金蛙)를 후사(後嗣)로 하니라.

여자를 太白山의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얻고 물으니 나는 하백(河伯)의 딸로서 유화(柳花)라고 하는 자인데 동생들과 놀적에 한 남자가 있어 자칭(自稱)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潄)라하고 나를 유인하여 웅심산(熊心山)밑에 압록실(압綠室) 중에 들어가 나와 사통(私通)하고 기왕에 돌아오지 못한지라 부모님은 무모하게 사람을 따라간 것을 책(責)하여 드디어 여기에 적거(謫居)하게 되었다하더라 금와(金蛙)가 이상히 여겨 유화(柳花)를 방에 유폐하였다. 햇빛이 비추이면 이를 피하였으나 해의 그늘이 또 찾아와 임신(姙娠)하였으니 한 알을 생산한지라 왕이 이를 버려서 개나 도야지에게 주어도 이를 먹지 않고 길바닥에 버린즉 우마(牛馬)가 모두 이를 피하고 드디어 들판에 갖다버리고 새들이 이를 덮어서 감싸는지라 왕이 이를 괴이(怪異)하게 여겨 이를 쪼개고저 하나 부능(不能)한지라 이를 유화(柳花)에게 돌려주었더니 유화(柳花)가 이를 받아 따뜻한 곳에 두니 한 남자아이가 껍질을 깨고 출생(出生)한지라 골상(骨相)이 수려(秀麗)하고 나이 일곱 살에 다른 아이와 달리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니 백발백중(百發百中)이라 부여(扶餘)의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자를 주몽(朱蒙)이라하였으니 그 주몽(朱蒙)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 (계속)


고구려의 건국신화(주몽 이야기)(2)
 
 

왕에게 입곱아들이 있어 언제나 주몽(朱蒙)이와 함께 놀더니 그 기능(技能)이 주몽( 朱蒙)을 따라갈 수가 없어 그 장남( 長男) 대소(帶素)가 왕에게 이르기를 주몽(朱蒙)은 보통사람의 소생(所生)이 아니므로 그 위인(爲人)이 뛰어난지라 만약 이를 처치(處置)하지아니하면 필시 후환(後患)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이를 제거하소서 한데 왕이 이를 듣지 아니하고 주몽이로 하여금 말을 키우게 한 후에 朱蒙이 그 준마(駿馬)를 알아보고 그 먹이를 줄이고 야위게 하고 우둔한 말은 이를 잘 먹여서 이를 살지게 하니 왕이 살찐 말을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朱蒙이에게 주더라. 뒤에 들판에 나가 수렵(狩獵)할 제 朱蒙이 활을 잘 쏘므로 화살이 작은 것은 朱蒙이에게 주고 화살이 긴 것은 자기들이 차지하였으나 그 짧은 화살로 주몽(朱蒙)이가 더 많이 잡았더라.. 王子와 신하(臣下)들이 주몽(朱蒙)이를 죽이기를 모의(謀議)하니 주몽(朱蒙)이의 어미 유화( 柳花)가 음밀( 陰密)히 이를 알고 가로대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하니 너의 지략(智略) 으로서 하면 무엇이 못할  것이 있곘느냐 여기에 지체(遲滯)하여 욕(辱)을 당하는 것 보다는 멀리 귀양 감만 못하다 하거늘 朱蒙이 그렇다고 하고는 조이(鳥伊) 마리(摩離) 협부(陜父)의 세 사람으로 벗으로하여 엄호수( 俺虎水) (별명은 개사수(盖斯水),지금 압록강의 동북쪽)에 나아가 강을 건너고저 하니 다리가 없는지라 朱蒙이를 잡을려고 좇아오는 병사들을 두려워하여 물에 고(告)하기를 "나는 본시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外孫)이니 좇아오는 병사들로부터 나를 구(救)하라"한데 말이 떨어지자 고기 떼와 거북이 떼가 올라와서 다리를 놓는지라 朱蒙이 江을 건너니라 주몽(朱蒙)이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세사람을 만나니 그 하나는 삼베옷을 입고 하나는 중옷을 입고 하나는 수조의(水藻衣)(물 파래 옷)를 입은자라 朱蒙이 너이들은 왠사람이냐 하니 삼베옷을 입은자는 재사(再思)라하고 납의(衲衣)(중옷)을 입은자는 무골(武骨)이라 명(名)하고 수조의(水藻衣) 한자는 묵거(黙居)라 이름한다하나 그 성(姓)은 말하지 않아 이에 朱蒙은 再思에게는 극(克)씨 성(姓)을 주고 무골(武骨)은 중실(仲室)성(姓)을 묵거(黙居)는 서실(小室)이라 명하고 이윽고 대중(大衆)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명(天命)을 받들어 원기(元基)를 열려고하노라 여기 삼현(三賢)을 얻으니 어찌 하늘이 내린 것이라 아니하리오 하고 각기 그 능력을 보아 소임을 맡겨 이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니 (중국의 위서(魏書)에는 걸승 골성(骨城)이라하다)그 토양이 비옥하고 山川이 아름답고 험준(險峻)함을 보고 여기에 도읍(都邑)하려하나 궁궐(宮闕)을 만들지못하고 갈대풀을 沸流水상에 엮어서 여기에 거(居)하면서 나라를 고구려(高句麗)라하고 고(高)씨로서 성(姓)을 삼으니 갑신(甲申)의해요 신라 혁거세왕(新羅 赫居世王) 21년의 해라 주몽(朱蒙)의나이 22세때라 사방에 소문을 듣고 투항(投降)하는자가 많더라.     

고구려의 건국신화(주몽 이야기)(4)
 
말갈이 부락에 연이어 침입하여 도적질하므로 멀리하였더니 말갈이 두려워하며 굴복하여 감히 침범하지않더라 왕이 하루는 비류수중에 야채의 잎이 뜨내려 오므로 사람이 상류에 있음을 알고 수렵을 하며 찾아가 비류국에 당도하니 그 국왕 송양이 마중나와 보면서  가로대 과인이 바다 구석진 곳에 편재하여 군자에게 볼 기회가 없었으나 오늘 서로 상봉함이 다행이 아닌가 그러나 당신은 어디서 온것인지 모르겠노라 하니 답하여 가로대 나는 천제의 아들로 모지에 도읍하였다 하니 송양이 가로대 나는 누세에 걸처서 왕이나 땅이 협소하여 두임금을 받아 들이기에는 부족한지라 당신은 도읍을 정함이 일천하니 나의 부용(속국)이 됨이 여하오 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말 다툼을 하고 서로 활을 쏘아 ,예를 비교하니 비류국왕이 저항하기 부능이라 고구려 2년 여름 6월에 비류국왕 송양이 나라를 들어 와서 항복하니 왕이 즉 그 땅으로 다물군이라하고 송양으로서 국주로하니 고구려말에 번토를 복함에 말하여 다물이라하는고로 이름 하니라.고구려 11년 겨울 10월에 고구려는 병을 일으켜 북옥저를 멸하니 옥저는 일명 치구루라 (현재의 위원초산방면)그 땅인즉 북은 읍루를 접하니 읍루는 불함산의 북동에 있고 큰바다에 접한지라 그 땅은 다수의 산험에 사람은 모두 용력이 뛰어나 땅의 기운이 차고 항상 비어있어 그활의 길이는 4척이고 화살은 기리가 8촌이라 청석을 촉으로 쓰고 옛날의 숙신씨의 나라더라. 한나라 이래로 부여에 신하의 나라가되어 조세와 부역을 하니라 그러나 그 풍속이 배를 타는것을 좋아하여 관략을 교묘히 하므로 옥저가 이를 두려워하므로 여름은 암혈에 잠복하고 겨울은 뱃길이 불통함에 이르러 내려오더니 이에 멸망을 당하니라 고구려 14년 고구려왕의 생모 유화가 동부여에서 졸하니 부여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서 장사지내고 신묘를 건립하니라 겨울 10월에 고구려왕이 방물을 치하여 후히 감사하니라. 고구려 19년 가을 9월에 고구려왕 주몽이 몽하니 용산에 장사지내고 동명왕이라하니 주몽의 재위는 18년에 나이는 40 이더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