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

일본 중국 비교

zarashin 2009. 3. 12. 11:54

 

 

 

 

 

 

국가 :

 

 

 

 

 

국명 : 中華人民共和國 (People's Republic of China: PRC)
건국일 : 1949년 10월 1일
수도 : 北京
면적 : 9,596,900 ㎢ (한반도면적의 44배 · 남한면적의 약100배에 해당, 세계 3위)
  • 남북 : 남사군도(23˚N) .....흑룡강(53˚32´N), 5,500㎞
  • 동서 : 파미르고원(73˚E)...우수리강(135˚E), 5,500㎞
  • 영해 : 12해리(1958.9.4 선언, 1992.2.25 영해 및 접속수역법 제정공포)
  • 국경선 총길이 :20,280㎞
    - 한국,러시아,몽골,중앙아 3국,아프카니스탄,파키스탄,인도,네팔,부탄,미얀마,라오스,베트남 등 14개 국가와 육지접경
인구 : 12억 8,303만명(2002.6 기준)
  • 인구증가율 : 0.87%
  • 연령별 :
    - 0-14세: 24.3% (남:여=1.1:1)
    - 15-64 세: 68.4% (남:여=1.06:1)
    - 65세 이상: 7.3% (남:여=0.89:1)
민족 : 漢族(91.9%), 55개 소수민족(8.1%)
언어 : 만다린 (지역에 따라 소수민족언어병용)
국정공휴일 : 元旦(1.1), 春節(음력 1.1), 노동절(5.1), 국경절(10.1)
종교 : 무신교 (소수의 도교, 불교, 이슬람교, 개신교 존재)
국기 : 오성홍기(五星紅旗)
 
  • 오성홍기五星 : 가장 큰 별과 주위 네개의 별은 각각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을 대표하며,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조화,단결하는 인민을 상징
  • 紅旗 : 붉은 홍색바탕은 "革命"을 상징
국가상징 :
  • 국가상징중앙의 천안문은 중국인민의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민족정신을 상징
  • 천안문 아래 둥근 황금색 톱니바퀴와, 주위의 곡식은 각각 "노동자계급"과 "농민"을 상징
  • 國旗와 마찬가지로, 황색의 五星중 가장 큰 별과 주위 네개의 별은 각각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을 대표하며,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조화,단결하는 인민을 상징

 

 

 

의용군행진곡(義勇軍進行曲)

  1930년대 일본의 침략하에 있던 중화민족으로 하여금 단결과 항일정신을 고무시키고자 만들어진 영화 <風云兒女> 주제곡으로 사용된 바 있는 <義勇軍進行曲>은 1935년 만들어져, 1949.9.27 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로 결정, 1982.12.4 全國人民代表大會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 정식국가로 결정됨.

< 義勇軍進行曲 > 田漢 詞 / ?耳 曲
起來!
不願做奴隷的人們!
把我們的血肉,築成我們新的長城.
中華民族到了最危險的時候,
每個人被迫着發出最後的吼聲.
起來! 起來! 起來!
我們萬衆一心,
冒着敵人的?火前進!
冒着敵人的?火前進!
前進! 前進! 進!

일어나라!
노예되기 원치않는 사람들이여!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장성을 쌓아가자
중화민족 앞에 위기는 닥쳐,
사람마다 외치는 최후의 함성
모두 일어나라!
철석같이 뭉쳐,
적의 포화를 뚫고 전진!
적의 포화를 뚫고 전진!
전진! 전진! 전진!

정치체제 : 노농연맹에 기초한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 국가(93년 신헌법 제1조 규정)
 
  • 정부형태 : 공산당 일당 독재(형식상 8개 정당존재)

  • 의회 : 단원제(전국인민대표대회)

  • 주요지도자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 胡錦濤 (후진타오, Hu Jintao)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江澤民 (쟝쩌민, Jiang Zemin)
    국무원 총리 溫家寶 (원쟈바오, Wen Jiabao)
    국가 부주석 曾慶紅 (쩡칭홍, Zeng Qinghong)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吳邦國 (우방궈, Wu Bangguo)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 賈慶林 (쟈칭린, Jia Qinglin)
    외교부장 李肇星 (리자오싱, Li Zhaoxing)

  • 주요정책
    -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 추진
    - 대륙-대만간 국가통일 실현(1국 2체제 방식)
    - 패권주의 반대, 세계평화 옹호

  • 유엔가입 : '71.10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 정치약사
    - 1911
    - 1921
    - 1928
    - 1936
    - 1937
    - 1949
    - 1950
    - 1958
    - 1960
    - 1966
    - 1972
    - 1976
    - 1977
    - 1978
    - 1979
    - 1982
    - 1988
    - 1989.  4
    - 1989.  6
    - 1989.11
    - 1992.  2
    - 1992.  8
    - 1992.10
    - 1997.  2
    - 1997.  7
    - 1997.  9
    - 1999.12
    - 2002.11
    - 2003.3
    신해혁명
    中國共産黨 창당(上海, 1921. 7. 1)
    中華소비에트정부 수립(주석 : 毛澤東)
    西安事件 발생
    中·日전쟁 발발, 제 3차 국공합작
    中華人民共和國 건국(北京, 1949.10. 1)
    한국전쟁 참전(1950.10)
    大躍進運動 전개
    大躍進運動 실패
    文化大革命
    닉슨 美대통령 방중, 中·日국교수립
    毛澤東 사망, 華國鋒 체제 출범
    鄧小平 복권, 문화대혁명 종결선언
    4개 현대화노선 채택(黨 제 11기 3中全會)
    中·美 국교수립
    新憲法 채택
    趙紫陽 총서기 취임
    胡耀邦 총서기 사망,, 민주화 요구시위(1989. 4)
    천안문사태 발생, 趙紫陽 총서기 실각, 江澤民 총서기 취임
    江澤民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취임
    鄧小平 南巡講話, 개혁개방촉진
    韓·中 국교수립
    제14기 공산당대회(헌법개정 및 사회주의 시장경제 방침 결정)
    등소평 사망
    홍콩의 중국귀속
    제15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마카오 중국귀속
    제16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胡錦濤 당 총서기 등 제 4세대 지도부 등장)
    제10기 전인대(胡錦濤 국가주석 등 선출)
경제 : (2002년 주요지표)
 
  • 경제성장률 : 8.0 %
  • GDP : 102,398억 위안
  • 물가상승률 : -0.8%
  • 총무역액 : 6,208억 불
    - 수출 : 3,256억 불
    - 수입 : 2,952억 불
    - 무역수지 : 304억 불 흑자(전년대비 34.6%상승)
  • 외국인투자 : 527억 불
  • 환율(元/미$) : 8. 2773
  • 외환보유고 : 2,864억 불
국방 : (2002.12 중국 국방백서)
 
  • 국방예산 : $ 205억
  • 군사력(정규군) : 총 237만명
    - 육군 160만, 해군 25만, 공군 42만, 제2포병 10만
    - 제 15차당대회(97.9)에서 군의 현대화, 정예화를 위해 50만명병력감축 결정후 '99년말 300만 →250만명 감군실현

 

행정구역 :

省級 : 22개성, 4개직할시, 5개자치구, 2개 특별행정구 (중국은 대만을 23번째 성으로 간주)

  • 성(22개)
           - 화북구 : 하북성, 산서성
           - 서북구 : 섬서성, 감숙성, 청해성
           - 동북구 :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 화동구 :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강서성, 복건성, 산동성
           - 중남구 : 하남성, 호북성, 호남성, 광동성, 해남성
           - 서남구 : 사천성, 운남성, 귀주성
  • 직할시(4개) : 북경 , 천진, 상해, 중경
  • 자치구(5개) : 내몽고, 신강위구르, 서장, 광서장족, 영하회족 자치구
  • 특별자치구(2개) : 홍콩, 마카오
    - 경제특구(5개) : 션쩐(深玔), 주하이(珠海), 산터우(汕頭), 샤먼(厦門), 하이난(海南)
    ※ 서부대개발지역(12개) : 四川省, 貴州省, 雲南省, 陜西省, 甘肅省, 靑海省, 寧夏自治區, 新疆自治區, 內蒙古自治區, 廣西自治區, 西藏自治區, 重慶市

그밖에,
州級 (총 337개) : 113地區, 30자치구, 8맹(내몽고) 185시
縣級 (총 2181개) : 260시, 1748현, 114자치현, 51旗, 3自治旗, 3특구, 1공업구, 1林區
市轄區 (총 650개) : 35직할시 시할구, 615성(자치구), 할시시할구
鄕, 鎭 : 鄕과 鎭은 각각 농촌과 도시의 말단단위로 분류

 

dlfq

아시아 대륙 동쪽에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일본열도를 차지하는 나라.

위치 : 동북 아시아
면적 : 37만 7835㎢
인구 : 1억 2710만 명(2001)
인구밀도 : 336.4명/㎢(2001)
수도 : 도쿄
정체 : 입헌군주제
공용어 : 일본어
통화 : 엔(¥)
환율 : 119.13엔 = 1달러(2001.9)
1인당 국민총생산 : 3만 2035달러(1999)

면적은 37만 7835㎢, 인구는 1억 2710만 명(2001), 인구밀도는 336.4명/㎢(2001)이다. 일본어로는 ‘니혼’ 또는 ‘닛폰’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한서(漢書)에서 수서(隋書)까지 ‘왜(倭)’ 또는 ‘왜국(倭國)’으로 기록하여 왔으며, 한국에서도 일찍이 그렇게 불러 왔다. 북쪽으로 홋카이도[北海道] 북쪽의 소야[宗谷]해협 및 북동쪽의 네무로[根室]해협을 끼고 러시아의 사할린 및 쿠릴열도 남단의 구나시리섬과 대하며, 남쪽으로는 난세이[南西]제도가 타이완[臺灣] 근해까지 이어진다. 서쪽으로는 동해(東海)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의 연해주(沿海州:Primorskij Kraj) 및 한국과 대하는데, 대한해협 중간에 있는 쓰시마섬[對馬島]은 부산에서 50km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 등이 산재하면서 태평양에 면한다.

문화

일본에는 3대 주요 전통극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이 '노'로서 14세기에 탄생했다. 무대 장치는 간단한데, 배우는 가면을 쓰고 전통 의상을 입는다. 배우들은 대사를 읊조리며 매우 천천히 움직인다. 두번째로 가부키는 17세기에 생겨났다. 가부키는 극적인 장면과 동작이 많고 의상은 정교하며 화려하다. 가부키는 관중 가까이에서 연기를 하기 위한 통로(하나미치)를 포함해 무대 장치가 복잡하다. 마지막으로 분라쿠는 인형극의 일종이다. 이는 16세기에 최초로 공연되었다. 인형은 사람의 절반 크기로 거의 실제 사람과 같다. 각 인형은 3사람이 조종하며 이들을 무대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의 전통 민속 음악 또한 활발하다.

민요, 민속악기연주 및 민속춤 모두가 오늘날 인기를 얻고 있다. 축제에서 민속악기 연주(특히 큰북) 및 민속춤은 관중의 눈길을 끈다. 목판화는 수많은 일본 회화 형태 중 하나이다. 잘 알려진 목판화 형태의 우키요에는 17세기에 탄생했다. 우키요에는 사람 및 자연 풍경, 일상 생활 및 극장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목판화는 지금까지도 매우 인기가 있어 학생들은 간단한 목판화 만들기를 배우며, 더러는 이 방법으로 자기만의 연하장을 만들기도 하다. 일본의 공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도자기, 제지, 직물, 칠기, 그리고 목각이다. 질기고 아름다운 일본 종이(와시)는 손으로 만든다. 이 일본 종이는 예술적이거나 실용적인 용도에 쓰인다. 오늘날 직물에 행해지는 특수 염색 및 직조 기술은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 무늬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칠기는 아름다울뿐더러 잘만 간수하면 몇 해고 보존된다. 가장 인기 있는 색상은 붉은색과 검은색이다. 일본의 도자기 공예는 12,0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도기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일본의 전통 도자기는 수백 년 동안 계승되어왔다. 근대에는 도자기도 그림, 조각과 함께 예술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목각술 또한 전통 일본 예술의 하나다. 정교한 목각술로 사찰 및 신사를 장식하며, 많은 가정에서는 나무를 조각하여 만든 접시, 나무인형(고케시)등의 작은 장신구를 가지고 있다.

일본 학생들은 학교에서 만요슈와 같은 고대 시집, 겐지이야기와 같은 고대 영웅 소설 및 세이쇼나곤의 옛날이야기와 같은 일기 형식의 에세이 등 일본의 전 문학을 배우고 있다. 현대 문학은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994년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받음으로써 인정받고 있다. 이 밖에도 국제적 명성을 지닌 20세기 작가로는 나쓰메 소세키, 미시마 유키오, 아니자키 존이치로 및 아베 고보 등을 들수 있다.

현대 작품의 인기 있는 또 다른 형태가 만화다. 만화는 일반적으로 각 책마다 새로운 내용을 담은 시리즈물이나, 사회 정보, 역사 또는 기타 논픽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때때로 만화영화로 제작되어 극장 및 텔레비전에서 인기리에 상영되기도 한다. 일본의 만화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인 것에서부터 국제적인 종목에 이르기까지 널리 스포츠가 보급되어 있다. 축구, 전통무술, 겨울스포츠, 야구, 수상 스포츠등이 특히 대중화되어 있다. 외국에 잘 알려진 또 다른 전통 일본 스포츠로는 스모가 있다. 면이나 비단으로 만든 두껍고 무거운 샅바(마와시)만을 두른 거구의 두선수가 서로 쓰러뜨리거나 동아줄을 둘러친 원형의 씨름판 밖으로 밀어내는 경기다. 경기 시간은 보통 1분 미만으로 매우 짧으며, 눈깜짝할 새에 끝나기도 한다. 모든 경기는 정화의 표시로 씨름판에 한줌의 소금을 뿌리는 의식으로 시작된다. 스모 선수들은 열광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며, 10대 중반에 시작하여 수년간 훈련한다.

일본에서는 야구와 축구가 특히 인기 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유명 선수들로 구성된 프로축구팀에 대한 일본 축구팬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프로축구는 1992년 출발과 동시에 성공적인 J리그를 이루게 된다. 또 다른 열렬한 팬들을 가지고 있는 스포츠가 야구다. 전국 고교 야구대회는 매년 봄과 여름에 2회 열린다.

대한관계

한국과 일본은 예로부터 문화적으로 폭넓게 교류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이 일본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러나 한국보다 먼저 개국을 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실현한 일본은 근대 열강의 세력이 한국에 밀려들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에는 청(淸)·러시아와 더불어 한국에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876년 한국은 일본의 강압으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게 되면서 개국을 하였으며, 그때부터 일본은 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으로 청·러시아 세력을 물리친 일본은 한국으로 하여금 강제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한일협약(韓日協約)을 맺게 하고,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어 한국에 통감부(統監部)를 설치하였다.

고종이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고, 전국에서 의병들의 봉기가 잇따르는 등 거국적인 항일(抗日)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후 통감부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대체하여 식민지 통치를 실시하였다. 총독부는 무단정치(武斷政治)를 단행하여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하는 한편, 경제면에서는 한국을 일본의 독점적 상품시장 및 식량·원료 공급지로 개편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철저하게 실시하였다.

먼저 화폐·금융·수송·통신 등의 유통기구를 정비하고, 한국민족자본의 산업자본화를 철저히 통제하였으며, 특히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하에 광대한 토지를 농민으로부터 수탈하였다. 그와 같은 식민지 정치에 대한 항거가 국내외에서 항일의거 및 독립운동으로 계속 나타나다가 1919년 마침내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다. 한편 4월에는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그 후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3·1운동은 일본의 무력 앞에서 수많은 사상자와 투옥자를 낸 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으나, 한국민족의 독립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한편, 일본으로 하여금 종래의 무단정치를 완화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정치의 실시로 언론·출판·결사·집회가 일정한 범위 내에서 허용되어 한글로 된 신문·잡지가 발간되고 각종 단체, 특히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정책전환은 효과적인 식민지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비밀결사와 그 운동의 표면화를 노린 계략에 불과하였다. 국내에서는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이 1930년까지 지속되었고, 해외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항일투쟁이 만주 일원 및 시베리아 등지를 거점으로 끈질기게 지속되다가 만주사변 이후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에 통합되었다. 한편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부터 한국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재편성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수력자원 및 값싼 식민지 노동력의 착취를 전제로 일본독점자본의 한국진출이 본격화되었다. 동시에 한국인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정책을 강화하여 한국어교육의 금지, 창씨개명(創氏改名)의 강요, 황국신민의 서사(誓詞) 구송(口誦), 신사참배 강요 등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였다. 또 태평양전쟁 중에는 한민족에 대한 탄압과 착취가 한층 심해져서 1938년 ‘지원병제’, 1939년 ‘징용제(徵用制)’가 실시되어 한국 청·장년에게 병역·노역(勞役)이 강요되었고, 1942년에는 지원병제가 ‘징병제’로 바뀌었다. 또 한국학생에게도 일본학생에게 과해진 ‘학병제(學兵制)’가 똑같이 과해졌다.

다른 한편으로 각계각층의 한국국민이 농산물 공출, 유기(鍮器)·철물 등 군수물자 공출, 군용기 헌납금 갹출, 송근유(松根油) 채취 등 패색이 완연한 전쟁을 강행하려는 그들의 억지시책에 시달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게 되면서 한국은 그 동안의 독립운동의 결실로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대일(對日)강화조약의 성립과 때를 같이하여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이 시작되었으나 회담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회담진전을 저해한 주된 요인으로는 1953년 10월 제3차 회담에서의 구보타[久保田]망언사건(일본측의 대표 구보타가 “일본에 의한 1936년 간의 한국통치는 한국에 유익한 것이었다”고 망언한 사건), 1959년 8월 일본과 북한 적십자사 간에 체결된 재일교포 북송협정 및 일본의 독도(獨島) 영유권 주장 등을 들 수 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정권이 등장하면서 그 해 11월 최고회의의장 박정희와 일본총리 이케다[池田] 간의 회담, 1962년 11월 ‘김종필·오히라[大平] 메모’ 작성 등 한·일관계의 조속한 타결을 위한 양국의 노력이 경주되어 1965년 6월 22일 ① 기본조약, ② 어업협정, ③ 경제협력협정, ④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협정, ⑤ 문화협정의 5개 협정으로 된 한·일협정이, 이어 1966년 3월에는 무역협정, 1967년 8월에는 항공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후 양국관계는 특히 경제면에서 급속히 진전되어 1967년 이후부터는 한·일정기각료회의를 발족시켜 연례회의를 개최하고 있으며, 1981년 4월 한국측에서 제기한 대일(對日) 차관교섭은 1983년 l월 대통령 전두환과 일본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간의 정상회담에서 최종타결을 보았다.
그 결과 정부개발협력자금 18억 5000만 달러, 수출입은행 차관 21억 5,000만 달러를 합하여 총 40억 달러를 7년에 걸쳐 연리 6%로 대여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일무역적자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시정요구가 있었으나 일본은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가 1993년 11월 대통령 김영삼과 일본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간의 정상회담에서 경제관계의 균형적 발전을 협의하기 위한 ‘한·일신경제협력기구(NIEP)’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한국과 일본이 주요 무역상대국이라는 양국 상호간의 인식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은 미국에 이어 제2위의 수출상대국이면서 동시에 미국을 앞지르는 제1위의 수입상대국이고, 또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미국에 이어 독일과 맞먹는 제2∼3위의 수출상대국이다. 1994년만 하더라도 일본은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이 135억 2285만 달러인 데 비해, 수출은 253억 8998만 달러였다. 1998년에는 수입 122억 4000만 달러, 수출 168억 4000만 달러, 2001년에는 수입 161억 달러, 수출 260억 1000만 달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계속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일본은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한·일기본조약을 위배하면서까지 민간차원을 빙자하여 대(對)북한접촉을 계속하고 있으며, 또 정부관계자들의 망언 등으로 한국과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1994년 5월에는 법무장관 나가노 시게토[永野茂門]가, 8월에는 환경청장관 사쿠라이 신[櫻井新]이, 10월에는 통산장관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가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구미열강으로부터 아시아제국(諸國)을 구하기 위한 방어전쟁이었다”라고 망언을 하는가 하면, 1995년 6월과 10월에는 전(前) 부총리 겸 외무장관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와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한일병탄조약의 합법성을 주장하여 한일관계를 악화시켰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을 양국이 공동개최하게 되었고 1999년 3월 총리 오부치 총리의 방한 때 한·일문화교류회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1998년 10월 대통령 김대중의 국빈 방일시 양국 정상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과 이에 따른 부속서인 '행동계획'을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양국은 현재 해당 부처별로 후속조치를 추진중이며, 양국 외교부에서 추진상황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있다. 2001년 10월과 2002년 3월에는 일본 총리 고이즈미 준히치로[小泉 純一郞]가 방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