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세기의 신라 순금제 굽다리 접시와 완.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무왕과 선화공주 얘기는 재미있다. 삼국유사는 백제 제30대 무왕(600~641년 재위)과 신라 제26대 진평왕(579~632년 재위)의
딸 선화공주에 관한 동화 같은 얘기를 길게 전하고 있다. ■ 무왕과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는 과부로, 백제의 수도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 장이다. 장의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맛동이라 불렸다고도 함)이다. 마를 캐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컸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아 변장하고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 갔다. 그곳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 주고 친해진 다음,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다.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시집 가 놓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노래는 온 장안에 퍼지고 대궐 안에까지 들렸다. 펄쩍 뛴 대궐 관리들은 임금에게 아뢰어 공주를 멀리
귀양 보내게 했다. 어머니인 왕후는 공주를 귀양 보내며 순금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 했다. 공주가 귀양 터로 가는
길목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서동은 공손하게 인사하여 잘 모시고 가겠다고 한다. 공주는 서동을 좋아하게 되고 그를 따라 백제로 가게 된다. 서동의
집에 도착하자 공주는 어머니가 준 황금을 꺼내 놓고 장차 살 궁리를 하자, 서동은 크게 웃는다. “이런 건 마 캐는 곳에 얼마든지 있소. 흙덩이처럼 마구 쌓아 뒀지요.” 공주는 놀라며 말한다. “황금은 천하 보배입니다. 그것을 거두어서 우리 부모님이 계시는 대궐로 보내는 것이
어떨까요?” “그렇게 합시다.” 서동은 사자사(지금의 전북 익산 미륵산 사자암)의 지명법사와 의논, 하룻밤 사이에 그 황금을 신라
궁중으로 보낸다. 그 신비로움에 감탄한 진평왕은 서동을 존경하게 되었고 항상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이 같은 삼국유사의 기록이 옳다면, 서동은 홀어머니 슬하에서 산마를 캐고 장사하여 살던 가난한
청년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백제 제29대 법왕(599~600년 재위)의 아들이요, 즉위한 지 1년 만에 죽은 법왕에 이어 제30대
백제왕이 된 사람이다. 서동이 ‘법왕의 아들’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옳다면, ‘서동의 아버지’라고 삼국유사가 밝히고 있는
‘연못의 용’은 바로 법왕에 해당된다. 서동은 지체 높은 아버지와 연못가에서 살던 가난한 과부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아이인
셈이다. ■ 법왕 내력에 대한 학설 그의 아버지 법왕은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1년밖에 왕위에 있지
않았던 그의 내력에 대해서는 갖은 학설이 나돌고 있다.
법왕은 서역에서 제철기술을 익히고 백제에 돌아온 인물로, 전북
미륵산 일대에서 제철을 하던 집단의 우두머리였다는 설도 그 중 한 가지다. 고구려계의 제철집단을 이끌고 백제에 온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그는 또한 즉위 1년 만에 ‘죽은’ 것이 아니라, 왕위를 아들
무왕에게 물려주고, 일본 중부지방 나라에 진출, ‘법대왕’ 또는 ‘성덕태자(일본명 쇼토쿠타이시)’라는 이름으로 7세기 초 일본을 통치한 왕이라는
설도 있다. 그의 모습은 현재 일본 고액권인 1만 엔 지폐에 그려 넣어져 있다. 법대왕, 즉 성덕태자는 불교 진흥에 힘을 기울여 많은 사찰을
지었다. 나라현 이코마군 이카르가에 있는 유명한 호류지도 그가 건립한 절이다.
백제 법왕 역시, 살생을 금하고 수렵 도구까지 태운 철저한
불교 신자였다. 법왕의 후계 후보는 무왕 외에도 많았을 것이다. 그 경쟁자들을 제치고 차기 백제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막강한 배경이
필요했다.
만약 신라 왕가와 사돈을 맺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배경은
없다. 그래서 서동은 변장을 하고 서라벌로 가서 ‘흑색 선전’으로 선화공주를 낚은 것이다. 일본 산골의 숯구이집. 고대에는 제철터마다 이 같은 숯구이집이
있었다. ■ 우리나라와 일본의 숯구이 민화 우리나라와 일본에는 가난한 숯구이집 총각이 부잣집 아가씨를
만나 숯구이터에서 황금덩이를 발견, 큰 부자가 되거나 출세하거나 한다는 숯구이 민화가 전해지고 있다. 전라도 지방 등에 전파되고 있는 우리
민화의 이름은 ‘내 복에 산다’, 일본에 전해져 있는 민화의 이름은 ‘숯구이 장자’이다.
일본 민화 연구가들에 의하면, 이 옛 이야기는 일찍이 철물
장수에 의해 일본 전국에 퍼진 것이라는데,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가 그 시발점이 되어 있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무왕 역시 아버지
법왕처럼 일본과 깊은 관련이 있는 백제왕이다. 좀더 살펴 보자.
우리말 ‘굽다’와 일본말 ‘쿠부(くぶ·燒ぶ)’ ‘굽다’란 뜻의 우리 옛말 ‘구브’는 ‘굽다’란 뜻의 일본
옛말 ‘쿠부(くぶ·燒ぶ)가 되었다. 불 속에 음식이나 물건을 넣어 굽는 행위를 말한다. 장작 등을 넣어 불땐다는 뜻의
‘쿠베루(くべる·燒べる)’도 이 ‘구브’가 어원(語源)이다.
‘굽다’는 한편 ‘야쿠(やく·燒く)’라는 일본말이 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어(계속해서) 굽다(는다)’라는 뜻의 우리 옛말 ‘이야굽’이 압축되어 ‘야구’ → ‘야쿠’로 변화한
것이다. 백제 · 신라 힘겨루기는 ‘무쇠’ 때문 금으로 만든 백제 뒤꽂이. 국보 159호. 무령왕릉에서 출토.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길이
18.4㎝. “무왕은 당시의 왜를 장악해 백제 분국으로 통치하면서 태자
의자의 아들 풍장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파견한 것은 아닐까?” 백제 청년이 신라의 수도 서라벌까지 가서 어렵사리 신라 공주와 결혼했고 그 청년이 백제왕으로
등극했으면, 백제와 신라는 당연히 사이 좋은 이웃이 되었을 법한데 그러지 못했다. ■ 백제와 신라의 끊임없는 싸움 ‘서동’이라 불린 그 마장수 청년이 백제 제30대 무왕으로
즉위한 것은 서기 600년, 그 2년 후인 602년 신라와 백제 사이에는 충돌이 일어난다. 국경 싸움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가 먼저
신라를 친다. 잇따라 신라가 국경을 침범, 천산 등 큰 연못이 있는 지역에 성을 쌓자, 무왕은 크게 노하여 기마병과 보병 4만의 대군을 보내
응전한다. 그러나 막강한 신라군을 당해 내지 못하고 참패한다. 3년 후 신라는 또 백제 국경을 침범한다. 이후 신라와 백제의 국경 싸움은 2,
3년 간격으로 치열하게 되풀이된다. 그러다 무왕은 신라의 속함(지금의 함양) 등 여섯 성을 쳐서
빼앗고, 신라의 왕재성을 치고 성주 동소를 죽인다. 서기 629년에 이르러 백제는 승승장구하여 그간 신라가 빼앗아 간 땅을 모두 찾기 위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에 주둔한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자, 신라 진평왕은 당나라 왕에게 청을 넣어
중재해 줄 것을 당부한다. 당나라 왕이 나서서 두 나라의 화해를 주선했으나, ‘서로의 원수짐은 마찬가지였다’라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 싸움의 원인은 ‘무쇠’ 싸움의 원인은 무쇠에 있었다. 무쇠가 산출되는 지역, 제철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을 서로 확보하려는 데서 싸움은 끊임없이 빚어진 것이다.
그 무렵 백제는 탁월한 금속 제련술을 지니고 있었다.
1993년 10월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6~7세기의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국보 287호)’가 그것을 단적으로 일러 준다.
아름답고 정교한 대향로다. 백제인의 뛰어난 기술과 창의성은 철기 제조 분야에도 미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글이 삼국사기 무왕 대목에 잇따라
보인다. - 철갑과 조부를 선물로 보냈더니 당 태종이 매우 좋아하고 비단옷과 필목 3000단을 답례로
주었다.(무왕 38년) - 사신을 당에 보내어 금갑과 조부를 선물했다.(무왕 40년) 철갑이란 무쇠 갑옷이요, 조부란 글씨나 그림을 아로새긴 무쇠
도끼를 말한다. 그리고 금갑이란 금으로 만든 갑옷이다. 모두 실용품이 아닌 장식으로서의 철기이다. ‘무기를 장식품으로 삼을 만큼 백제는 평화롭고
풍요한 나라’라는 표현으로 이 같은 선물을 당나라에 보냈는지도 모른다.
당 태종으로부터 ‘신라와 싸우지 말고 화친하시오’라는 권고를
받은 집권 28년(627년)째부터 무왕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막강한 그 세력은 왜에도 미쳐 무왕 30년(629년)에 즉위한 왜왕 서명은 철저한
친백제계 인물로 우리의 주목을 끈다. 부여 백제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 실제 향로 높이는 64㎝. 국보 287호. 부여
능산리 유적에서 출토. ■ 일본 학계, ‘왜왕 서명은 백제 무왕과 동일인’ 일본 고대사 학계에서는 서명을 무왕, 바로 그 사람으로 보는
견해가 팽배하다. 당시 일본 수도는 나라의 아스카에 있었는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서명은 집권 11년째 되는 해에 아스카의 ‘백제천’ 냇가에
큰 왕궁과 큰 절을 짓는다. 구중탑도 세운다. 왕궁의 이름은 ‘백제궁’이다. 그러나 당시의 문헌을 깡그리 뒤져도 백제천이라는 강은 찾을 수
없고, 백제궁이나 구중탑의 흔적도 출토된 적이 없다. 그런가 하면 무왕은 집권 31년째 해인 630년에
사비(부여)의 궁성을 중수하고, 634년에는 왕흥사를 완성한다. 익산에 미륵사 다층석탑을 세운 것은 640년인 무왕 41년의 일이다.
궁성 남쪽에 못을 파 물을 20리나 끌어들여 못 안에 섬을
만들었고, 신선이 산다는 ‘방장선산(方丈仙山)’에 비겼다. 37년(636년)에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비하(금강) 북포에서 대대적인 연회도
베푼다.
이에 일본 학자들은 무왕에 비겨지는 왜왕 서명이 백제궁을
지었다는 강변이란 사비하, 즉 요즘의 금강가를 가리킨 것은 아닐까 하고 추정하는 것이다. 서명은 628년에 즉위했고 641년 백제궁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641년은 바로 무왕이 죽은 해이다. 기막힌 일치다. ■ 무왕은 풍장을 왜에 보내 무왕은 당시의 왜를 장악, 백제 분국으로 통치하면서, 태자
의자의 아들 풍장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파견한 것은 아닐까. 일본서기의 서명 3년 대목에는 풍장이 인질로 일본에 왔다는 기술이
보인다.
그리고 4년 후 일본 아스카의 ‘츠루기이케’라는 연못에 줄기는
하나인데 꽃송이가 둘이 있는 ‘일경이화’의 연꽃이 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 줄기에 두 꽃의 연꽃은 한 나라에 왕이 둘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정치적 암시다. 이 즈음의 왜에 임금이 둘이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백제의 세력이 아무리 튼실했다 하더라도, 무왕의 대리인 풍장은
아직 나이가 어렸고, 일본 중부지방의 제철을 한손에 쥐고 있던 소가 씨 문중의 세력은 막강했다. 흡사 임금이 둘 있는 형국이었다. ‘소가’라는
성 자체가 ‘무쇠갈기’, 즉 ‘단철’과 ‘단야’를 의미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서명과 무왕은 동시에 죽는다. 그리고 백제에 정변이
일어난다.
★ 우리말 ‘찌르개’ 일본말‘츠르기(つるぎ)’ 창이나 살촉 등 짐승을 찌르거나 가죽에 구멍을 내는 연장을
‘찌르개’라 부른다.
옛소리는 ‘찌’가 아니고 ‘치’에 가까웠고, 그것도 ‘츠’
음이었다. ‘츠르개’하면 ‘찌르는 것’이요, ‘츠르기’하면 ‘찌르는 일’을 뜻했다.
이 ‘츠르개’, ‘츠르기’가 일본에 가서 ‘칼’을 가리키는
일본말 ‘츠르기(つるぎ)’가 되었다. 이것은 양면의 날을 가진 칼, 아주 예리한 칼을 뜻했다.
한 쪽에만 날이 있는 큰 칼은 주로 ‘타치(たち·太刀)’라
불렸는데, 이는 ‘다치다’의 어간 ‘다치’가 ‘칼’이라는 뜻의 일본말이 된 것이다. 칼은 사람을 다치게 하는 연장이었기
때문이다.
[이영희 교수가 쓴 무쇠의 역사] (29) 수로부인 (중)
백제의 무쇠 화살촉. 길이 12.5㎝, 연산(連山) 표정리(表井里)
출토. 641년 3월, 백제 무왕이 죽자 그 해
11월에 일어난 정치적 혼란에 대해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무왕의 장례에 참석한 사신의 말을 소개한 것으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기록이다. “지금 백제는 큰 난리에 휩싸여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대좌평(백제의 최고위 관직) 사택지적(砂宅智積)이 죽었습니다. 올(642년) 정월에는 국왕의 어머니가 돌아가고, 왕자 교기(翹岐)와 그 어머니
여동생 등 여자 넷, 내좌평(궁궐 내관 관직) 기미(岐味) 등 고관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 ‘642년 정월’은 죽은 일본 왕 서명에
이어 왕비 황극(皇極)여왕이 왕위에 오른 달이다. 그리고 그해 4월에는, 섬으로 추방되었다는 백제왕자 교기가 황극여왕과 만나고, 일본 고관의
환대도 받고 있다. 그뿐 아니다. 7월에는 백제에서 죽었다는 대좌평 사택지적까지 일본 여왕 황극과 만나고
있다.
백제에서 추방되었다는 백제왕자가 어째서 일본 왕실에서 환대받고
있으며, 백제에서 죽었다는 고관 사택지적이 어째서 일본 황극여왕과 만나 환담을 했다는 것일까. 더욱이 황극여왕이란 교기의 친어머니로 그와 함께
섬으로 추방되었다는 바로 그 여인이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무왕이 죽자 백제의 왕위를 에워싸고 후계자 싸움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수수께끼는 쉽사리 풀린다. 무왕의 배다른 두 아들 의자(義慈)와 교기 사이에 치열한 왕권 다툼이 빚어진
것이다.
교기 뒤에는 지난날의 가야계 제철집단인 그의 생모(황극여왕)의
친정권속이 있었다. 그들은 가야 멸망 후에도 일본 중부지방에서 왕성하게 제철작업을 하고 있었다.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대좌평 사택지적도 교기
편에서 움직이다 형세가 불리해지자 죽은 것처럼 가장, 일본으로 도망친다. 그도 제철가문의 인물이다. 그의 성씨인 ‘사택’은 ‘사(무쇠)달구’,
즉 제철의 이두표기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백제 석비 ‘사택지적비’. 동강이 난 채 56자만 남아 있다. 높이 101㎝,
너비 38㎝, 두께 29㎝.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선화공주 642년 정월 사망 추정 이 모반사건에는 ‘국주(國主)의 어머니’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국주의 어머니란 의자왕의 생모를 말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의자왕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아, 의자왕의 어머니라는 여성이 신라 공주였던 선화인지 아닌지 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일본에 망명한 후 곧 일본왕으로 등극한
교기의 어머니 황극여왕의 아명은 보(寶)였는데, 이 여인이 선화공주가 아닌가 하는 학자도 있으나, 그 추측은 연령상 맞지
않다.
642년 정월에 죽은 ‘국왕의 어머니’는 선화공주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과 백제 왕위 계승 다툼이 어떤 연관성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짐작되는 일은, 의자왕 계열과 교기왕자 계열의
집단이 서로 패권을 쥐고자 겨루었으리라는 것이고, 그 와중에서 중재하려던 그녀는 백제 정통파의 원한을 사고 결국 죽음으로 몰리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어떻든 의자왕은 즉위한 다음 해부터 친히 군대를 이끌고
대대적인 신라 공격에 나서고, 40여 개 성을 함락시킨다. 휘하 장군을 시켜 신라 대야성(지금의 합천)을 치고, 항복한 신라 성주와 그 처자식의
목을 쳐서 부여로 보내 오게도 한다. 그리고 그 2년 후에는 신라 김유신 장군이 백제의 일곱 성을 친다. 이후 백제와 신라간의 본격적인 격전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다 의자왕은 즉위 13년째 되는 해(653년)에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다. 신라와 오랜 싸움에 지쳐, 그는 일본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신라는 이에 앞서 일본에 김춘추 등 친선사절단을 보내고
있었다. 사택지적은 으뜸가는 제철 재벌 일본에 망명한 지적이 ‘사택지적비’라는 석비를 만들게 한 것은
그 이듬해 일이다. 이 석비는 사택지적이 지난날을 돌이키며 인생의 무상함을 한탄한 글을 새긴 것으로, 그 글 중에 절과 탑을 세우는 데 필요한
금과 옥 등 재물을 희사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석비는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유일한 백제
석비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당시 일본 굴지의 재력가였던
사택지적이 의자왕의 간청을 받아 절을 짓는 재물 외에도 무쇠와 철기를 비롯한 많은 보급물자를 백제로 보냈으리라
짐작된다.
사택지적의 일본명은 후지하라 노카마타리(藤原鎌足). 그의
조상은 일찌감치 일본에 건너가 제철로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 사택지적은 으뜸가는 제철 재벌이요, 고위 관료이기도 했다. 그의 정실 아내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 사이의 딸로 간주되는 경(鏡)왕녀다. 그녀는 배다른 형제인 교기의 비로 있었는데, 교기의 간청에 의해 사택지적에게
하가(下嫁·신하와 결혼하는 일)한 것이다. 교기는 훗날 사택지적의 도움으로 일본왕이 된다. 그가 천지왕(天智王)이다. 나당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력을, 일본에서 백제로 보낸 바로 그 사람이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로 맺어진 백제와 신라의 연결고리는
이로써 단절되고, 백제는 끝내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
신라에는 미인이 많았다. 특히 수로부인은 빼어난 미모로 여러
차례 유괴사건에 휘말림으로써 삼국유사에까지 오른 유명한 미인이다. 남편은 순정공으로 신라 제33대 성덕왕(702~737 재위)
때 강릉태수였다. 당시 ‘하슬라’라고 불린 강릉과 명주군 일대는 신라의 북녘 변방으로 장정 2000명을 동원해 국경에 긴 성을 쌓았다고
하니(721년), 순정공은 산성 축조 공사의 총지휘관을 겸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지역은 본래 예국 땅이었으며, 철국이라고도
불렸다’라는 기술이 있다. 이 고장에서 무쇠가 많이 산출됐던 것이다. 또 이 책에는 인근의 삼척과 양양에서도 철광석이 나온다고 쓰여
있다. 강릉태수 순정공은 이 무쇠터에서 제철을 감독· 독려한 책임자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지닌 지방 장관이었지만 아내에겐 약했던 것 같다. 남편과 함께 임지로 가는 길에 이 미모의 아내는 외간 남자들에게 여러 차례 납치됐다가
되돌아오곤 했지만 오히려 당당한 그녀에게 순정공은 찍소리 한 번 내지 못했다. 하루는 바닷가에서 점심을 들고 있는데 용이 들이닥쳐 아내를 훔쳐 가 버렸다.
순정공이 허둥대고 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여러 사람의 말은 무쇠도 녹인다
했습니다. 마을 백성들을 모아 물가 언덕을 치며 노래를 부르도록 하시오. 용도 부인을 내놓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노인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과연 용은 바다 속에서 부인을 받들고 나왔다. 이때 부른 노래를
‘해가’(海歌)라 한다. “거북아 거북아, 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죄 그 얼마나 크리. 만약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 자, 이때 언덕을 지팡이로 치게 한 까닭은 무엇일까…. 언덕
또는 둑의 신라말이 ‘도게’, ‘도가’이다. 이는 ‘다오’라는 뜻의 신라말 ‘도게’, ‘도가’와 소리가 같다. 요즘의 경상도 사투리 ‘밥
도가’도 ‘밥 다오’의 뜻이다. 마을 사람들은 언덕, 즉 도게, 도가를 지팡이로 치면서 수로부인을 ‘도게!’, ‘도가!’, 즉
‘다오!’라고 외쳤던 것이다. 신라 제4대 석탈해왕의 옛말 이름이 ‘예도게’였다는 사실을 여기서 떠올려 주기 바란다.(포스코신문 2003년
10월 23일자 ‘무쇠의 역사’ 참조) 수로부인의 남편 순정공의 임지 강릉은 원래 예국의 영토였고, 석탈해, 즉 예도게는 이 예국
출신자였다. 당시 예국은 신라에 평정되어 나라를 잃은 지 오래된 상태였으나, 수준 높은 제철기술을 지닌 ‘철국’의 백성이었다는 자존심은 잃지
않고 있어서 그들은 순정공의 부임에 저항, 동해 앞바다에 배를 띄우고 부인 납치극을 벌인 것이다. 신라인들은 항해술에 강했던 예 사람을 흔히
‘용’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강 언덕, 즉 도게를 지팡이로 친 것은 신라왕까지 지낸 그들의
조상 예도게를 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수로부인을 내놓지 않는 한 너희 조상 예도게도 계속 내리침을 받을 것이라는 엄포다. 그런데 이 미인을
왜 ‘수로’라 불렀을까. 강릉태수였던 남편을 따라나선 부임길이 동해 바닷가의 ‘물길’이었으므로 물길이라는 뜻의 한자
‘수로’(水路)로 이름 지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 이름에는 좀 더 깊은 사연이 있다. 이야기는 1세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 일행이 처음 김해를 차지하려 했을 때, 그 곳 사람들로 하여금 구지봉이라는 언덕에 올라가 부르게 한 노래가
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 ‘대왕’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에 시킨 대로 했더니 하늘에서 자줏빛 줄이 드리워졌고, 그 줄에 매달린
금합을 열어 보니 황금 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황금 알은 열두 시간 후에 각기 잘생긴 어린이가 됐고, 열흘
후엔 9척의 장사가 됐다. 그 중의 한 명이 가락국, 즉 금관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요, 나머지 다섯 장사도 각각 다섯 가야국의 왕이
됐다…. 이것이 바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실려 있는 개국신화다.묘하게
이 대목에서 두 가지 일치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김수로왕과 수로부인의 이름 ‘수로’가 같다는 점.
둘째, 김수로왕이 나타나기 전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부르게 한 노래와, 수로부인이 납치됐을 때 부르게 한 노래가 똑같이 거북을 부르는 노래라는
점이다. ‘수로’는 가장 높은 사람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한자 ‘수로’(首露)를 이두로 풀면 ‘말로’(‘몰로’음에 가까웠다)라 읽힌다.
‘말로’란 ‘우두머리’, ‘으뜸인 사람’을 가리키는 옛말이다. 한편 물은 신라말로 ‘몰’이었다. 따라서 한자 ‘수로’도 이두로 ‘몰로’라 읽힌다. 수로부인은
아름답기로 으뜸가는 여인이라는 뜻으로 ‘말로’라 불렸을 것인데, 남편을 따라 동해안 ‘물길’을 가다가 유괴되는 등 사건이 많았던 탓으로
‘말로’와 흡사한 소리인 ‘몰로’, 즉 ‘물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 것은 아닐까. 수로왕과 관련이 있는 거북 노래의 가사를 약간 바꾸어 부인을 구출하는 ‘해가’를 지어 부르게 한 것도
수로왕과 수로부인의 이름이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수로부인은 김수로왕의 후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지체 높은 신라 미인을 다음 호에서 좀 더
살펴보자. 바다의 옛말이 ‘바랄’이다. 그래서 ‘바다’라는 말이
현대어요, 옛말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바다’도 옛말이다. 이 ‘바다’가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옛말 ‘와다(わだㆍ海)’가 됐다.
‘와타(わた)’라고도 불렀다. 우리말 ‘ㅂ’음은 일본어가 되면서 h음이나 w음이 된다. 우리말 ‘바다’는 또 ‘물 위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게 한다’라는 뜻의 일본말 ‘와타스(わたすㆍ渡す)’의 어원이기도 하다. 한편 ‘우미(うみㆍ海)’라는 일본어의 어원은 ‘으뜸가는(최고의)
물’을 뜻하는 우리 옛말 ‘웃미’이다. 바다란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으뜸가는 물’이다. 어원을 알면 낱말의 개념이 이와 같이 뚜렷해지니
참 신명이 난다. 우리말 ‘달구’와 일본말 ‘타쿠(たく·焚く)’ ‘달구’는, ‘불로 뜨겁게 하다’
‘굽다’는 뜻인 ‘달구다’의 어간이다. 요즘말인 동시에 옛말이다. 따라서 ‘달구벌’이라고 하면 ‘제철벌’을 뜻한다. 대구의 옛 지명이
‘달구벌’인 것은, 대구가 일찍이 제철을 하던 고장임을 뜻하는 이름이다. 이 ‘달구’가 일본에 가서, ‘태우다’, ‘굽다’란 뜻의 일본말
‘타쿠(たく·焚く)’가 되었다.
‘모닥불’의 일본말 ‘타키비(たきび·焚火)’ 역시 우리말에서
건너간 낱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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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국 무쇠꾼 노인 철쭉꽃 꺾어 바쳐(濊國) | |||||||||||||||||||||||||||||||||||||||||
신라 최고의 미인 언저리에는 사건도 많았다. 길을 걷던 수로부인(水路夫人)이 말했다.
“저 꽃을 꺾어다 내게 줄 사람은 없는가.” 수로부인이 가리키는 높다란 바위 봉우리에는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바닷가 길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낭떠러지 산꼭대기였다.
“저기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한 신하가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때마침 어미 소를 끌고 지나가던 한 노인이 이 말을 들었다.
그는 대뜸 산 벼랑에 올라 꽃을 꺾어 와, 스스로 지은 노래를 부르며 수로부인에게 바쳤다.
이 노래가 유명한 ‘노인헌화가’이다.
벼랑서 꽃 꺾어 부인에게 헌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14수의 신라향가 중 하나다. 이 옛 가사를 요즘 말로 고치면 다음과 같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어미 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거든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신라향가란, 신라 사람들이 지은 우리말 가사를 한자로 표기한 이두체 노래다.
이 신라향가와 같은 표기방식으로 쓰인 노래가 7, 8세기의 일본에도 있었다. ‘만엽집’이라는 가사집에 수록돼 있는 4516수의 노래가 그것이다.
이들 중에는 이중가(二重歌)가 많다. 겉보기에는 사랑이나 섹스, 풍경 또는 의식 등에 관한 노래지만 속내는 정치 음모나 체제를 비판한 것이 수두룩하다.
한자에는 음독과 훈독의 두 가지 읽음새가 있다. 가령 ‘신’(新)자만 해도, 음독으로 읽으면 ‘신’이지만 훈독으로 읽으면 ‘새’이다. 이같이 두 가지 읽음새가 있는 한자의 특성을 활용해 하나의 글자로 두 가지 뜻을 나타내어 읊는 방식의 노래가 이중가이다.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노인헌화가’에도 이 같은 이중적 읊음새가 보인다. 겉보기에는 ‘끌고 온 암소를 놓아 두고 꽃을 꺾어 바치겠다’라는 점잖은 노래지만, 속내는 영 딴판이다. ‘끌고 온 무쇠를 놓아 두고 내 남근을 바치겠다’라는 아주 야한 노래가 드러나는 것이다.
도대체 이 노인은 누구인가. 장정들도 감히 오르지 못한 산 벼랑에 거뜬히 올라 철쭉꽃을 꺾어 온 늙은이. 끌고 온 무쇠를 놓아 둔 채 수로부인에게 나를 바치겠다고 노래한 야한 지식인. 그는 당시 어디서 무엇을 하던 누구인가. 이것은 ‘노인헌화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최대의 의문점이다.
노래 마디를 해독하면서 이 미스터리에 접근해 보자. 먼저 원문 한자와 해독문을 소개한다.
먼저 ①의 ‘자포’는 자줏빛의 옛말인 ‘지배’(질배ㆍ짓배라고도 했음)의 이두표기다. ‘암호’는 ‘바오’(바고라고도 했음)로 바위의 옛말이다.
따라서 ‘자포암호과희’는 ‘자줏빛 바위 가에’로 새겨지지만 이것은 겉뜻이요, 속뜻은 ‘진(물기 흥건한) 배 박아 가이’가 된다. 수로부인과 섹스하고 가겠다는 의사표명이다. 첫마디부터 노래는 무엄하고 야하기 짝이 없다.
그럼 ③의 첫 단어 ‘모우’를 풀어 보자. 우(牛)의 훈독은 ‘소’. 요즘 말인 동시에 옛말이다. 소는 또 옛말로 ‘쇼’, ‘시’라고도 불렸다. 그런데 이 ‘소ㆍ쇼ㆍ시’는 모두 무쇠를 뜻하는 우리 옛말이다.
그럼 ‘모우’는 무엇을 뜻한 말일까. 겉뜻은 글자 그대로 ‘어미 소’, 속뜻은 ‘강철’이다. 고대 제철은 진흙으로 빚은 고로에 목탄을 지펴 그 위에 사철 뿌리기 작업을 사흘 밤낮동안 계속해 강철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강철을 고대어로 ‘깨라’(깨트려 쓰는 것의 뜻)라 불렀고, 어미모(母)자를 섞어 표현되는 한자 ‘무’( ???)로 표기했다. 강철은 가장 빼어난 무쇠였고, 우수한 철기의 모태가 되는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모우’는 어미 소인 동시에 어미와 같은 쇠 강철을 뜻하는 이중어였다.
수로부인 앞에 나타난 노인은 아마도 강철 제조 지휘자였거나, 철광석 광맥을 찾아 산을 헤매는 무쇠 찾기 전문가였을 가능성이 크다. 광맥 찾기 꾼에게 있어 산 벼랑 타기란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가 아니겠는가.
강릉으로 가는 동해 바닷가 일대는 무쇠의 산지였고, 일찍이 철국이라고도 불린 예(濊)의 영토였다. 이 무쇠꾼 노인도 예나라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노인은 무쇠 찾기 전문가
끝으로 ⑤의 ‘화’ 대목을 풀어 보자.
꽃의 옛말이 ‘곶’이다. 들에 핀 아름다운 꽃은 모름지기 ‘꺾어서’ 병이나 머리에 꽂아 장식으로 삼는 것이라는 고대인의 인식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꽂다’의 옛말이 ‘곶다’였다.
그런데 남근의 옛말도 ‘곶’이다. 성행위를 하는 것, 즉 꽂는 것이 남근이라는 뜻에서 이같이 불렸다. ‘치’, ‘지’도 남근을 가리킨 옛말이지만 이 말에는 ‘남성의 상징’이라는 뜻이 담겨 있고, ‘곶’은 ‘섹스의 도구’라는 뜻으로 쓰여져 온 말이다.
한편 ‘곶’이라는 말에는 ‘칼을 꽂다’ 즉 ‘살인’의 뜻도 있다. 따라서 ‘노인헌화가’에서 노인이 ‘곶을 꺾어 바치오리다’라고 한 것은 ‘살의를 꺾겠다’라는 뜻이 된다. 노인은 애초에 수로부인을 해치려 했지만 죽이지 않기로 했다는 얘기다. 만나 보니 아름다워 죽일 뜻을 접었다는 것인가….
지체 높은 신라 고관의 부인을 해치려고 한 이 노인은 누구인가. 왜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다음 호에서 알아 보자.
우리말 ‘꽃’과 일본말 ‘하나’
‘꽃’의 일본말이 ‘하나(はなㆍ花)’다. ‘하나’의 어원이 ‘피어나다’라는 뜻의 우리 옛말 ‘패나’. 우리말의 p음이 일본에 건너가 f음을 거쳐 h음이 됐고, ae(애)음이 a(아)음이 됐다. 따라서 우리말 ‘패나’는 일본말 ‘하나’가 됐다.
한편 ‘날개’의 일본말이 ‘하네(はねㆍ羽)’인데 이는 날개를 활짝 펴낸다는 뜻의 우리 옛말 ‘패내’가 ‘하네’로 바뀐 것이다. ’의 일본말이 ‘하네(はねㆍ羽)’인데 이는 날개를 활짝 펴낸다는 뜻의 우리 옛말 ‘패내’가 ‘하네’로 바뀐 것이다. |